“현실 무대엔 오른 적도 없는 가상(fictional) 아이돌이 음악 차트를 점령한 글로벌 스타가 됐다.”(미국 NBC뉴스)
이 정도일 줄이야. K팝 좋아하는 10대나 반색할 작품이려니 했다. 제목도 살짝 오그라들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케데헌).’ 걸그룹이 신비한 힘으로 악령을 때려잡는단다. 그런데 악당은 물론, 소셜미디어와 세계 음원 순위를 모조리 씹어먹고 다닌다.
지난달 20일 넷플릭스가 선보인 이 애니메이션은 2주 넘게 글로벌 영화 순위 1, 2위를 지켰다. 조회수는 6일 기준 약 4690만 회. 7810만 시간이 넘는다. 평단도 호응이 거창했다. “아카데미상(오스카) 애니메이션 장편 부문의 가장 유력한 후보”(미 영화매체 버라이어티)라고 부채질했다.
이어진 영화음악(OST)의 인기는 앞 물결을 덮친 거대한 파도였다. 수록곡 가운데 무려 7곡이 미 빌보드 싱글차트 ‘핫 100’에 이름을 올렸다. 앨범은 13일 기준 ‘빌보드 200’ 2위까지 치솟았다. 특히 타이틀곡 ‘골든’은 글로벌 200 차트에서 1위. 빌보드는 “가상 아티스트가 정상에 오른 건 빌보드 역사상 최초”라 했다. 이 노래는 오스카 주제가상 부문에 공식 출품될 예정이다.
‘로스트’에서 ‘케데헌’까지
도대체 뭔 일일까. 99분짜리 킬링타임용 만화인가 싶던 작품이 이런 지각변동을 일으키다니. 반갑고 뿌듯한데 낯설고 어색하다. 하지만 이 현상을 대중없이 툭 튀어나온 돌연변이로 봐선 곤란하다. K팝이 제대로 ‘돈 되는 장사 밑천’이기에 가능했다.
알려진 대로 케데헌은 소니픽쳐스가 제작한 ‘메이드 인 USA.’ 그런데 K팝 문화를 얼마나 정교하고 치밀하게 분석했는지 따져볼수록 놀랍다. 남산타워나 낙산공원을 완벽하게 그려낸 건 기본. 영어로도 표준어가 된 라멘(ramen)을 정확하게 “라면”이라 부른다. 수저와 젓가락 놓을 땐 냅킨을 까는 등 ‘한국식(式)’ 디테일도 꼼꼼하다. 공동 연출자인 크리스 아펠한스 감독은 “사랑에 빠지는 주인공을 그리려 수백 편의 K드라마에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연구했다”고 한다.
이건 결코 당연한 게 아니다. 2004∼2005년 한국을 소재로 해 우리를 흥분시켰던 미 ABC 드라마 ‘로스트(Lost)’를 떠올려 보라. 막상 마주했을 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극중 인물 권진수는 한국 토박이라면서 자기 이름을 “꽈찌쭈”라 발음했다. 맞춤법도 황당한 한글 간판이 내걸린 허름한 거리를 서울이라 우겼다. 그 지경으로 묘사해도 미드에 우리나라 나왔다고 반가웠던 게 불과 20년 전이다. 그런 맥락에서, 로스트의 배우 김윤진과 대니얼 킴이 케데헌에 목소리로 출연한 건 우연치곤 참 운명적이다.
K팝이 쏘아 올린 불꽃축제
해외에서 꼽는 케데헌 성공 요인을 다시금 짚어보자. IMDb 등 여러 매체들은 K팝의 “친근함(friendly)”을 높이 샀다. 한국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에게 한류는 생경한 변방 문화가 아니란 소리다. 강남역과 북촌 골목은 K팝에 빠져 한국을 찾았던 이들에게 좋건 싫건 추억의 장소로 각인됐다. 바로 그들이 ‘친구는 함께 목욕탕 가야 코리안 스타일’ ‘한국에선 식스팩을 옥수수(corn) 말고 초콜릿 복근이라 부른다’ ‘가자, 가자보다 빨리빨리가 맞다’는 영화평들을, 영어 스페인어 힌디어 댓글로 달고 있다.
케데헌의 영광이 어떤 경제적 이득을 안겨 줄진 모르겠다. 그래도 ‘자동차 몇십만 대 수출 효과’ 같은 클리셰는 접어두길. K팝은 이제 우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버라이어티는 이 영화를 “K팝 월드와 애니메이션 미학이 만난 페스티벌 같은 작품”이라 했다. 한국이 쏘아 올린 폭죽은 온 세상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가 됐다. 국위 선양의 봇짐은 잠시 내려두고, 세계로 퍼져가는 K팝 축제를 즐겨 보자. “쇼는 계속될 테니까(The Show must g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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