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7월 서울-경기 일대 대홍수
군사기지-일본인 신시가지 ‘용산’도 방수시설 못 갖춰 수해 위험지대 돼
직후 총독부 용산 등 방수공사 나서… 인근 조선인 마을 ‘이촌동’ 강제이주
주민들 노량진에 ‘復興村’ 짓고 자치
1925년 7월 ‘을축년 대홍수’ 당시 구용산 원정(서울 용산구 원효로) 일대의 침수 상황(위쪽 사진). 1925년 7월 9∼11일, 15∼19일 등 두 차례에 걸친 집중호우의 양은 753mm에 달했다. 복구가 채 이뤄지기도 전 잇단 폭우로 한강변 일대가 물에 잠겼다. 아래쪽 사진은 당시 홍수 피해로 무너진 한강철교의 모습. 사진 출처 국립중앙도서관《‘을축년 대홍수’로 보는 한강 수해
“17일 오후 8시에 37척 4촌(약 11.3m)에 달하여 위험이 경각에 달하였던 한강 연안 용산 일대에는 동 11시 반경에 38척 4촌에 달하여 수백 년 이래에 처음 있는 큰 홍수임으로 경성부 출장소에서 위급함을 일반에 알리기 위하여 경적까지 울리었는데 용산 관내의 침수 가옥은 마포 방면까지 합하여 2816호에 달하였으며 (중략) 제방 등이 약 20여 간이 터지어 무너져 붉은 물이 폭포 쏟아지듯이 수세(水勢)가 맹렬하여 백여 명의 인부와 구호반 30여 명이 급거 방수에 노력하였으나, 사나운 물결은 미처 걷잡을 수 없어서 삽시간에 용산 일대는 거의 전부가 침수되어….” (동아일보, 1925년 7월 19일)》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홍수의 무서운 기세가 실감 나는 옛 기사다. 훗날 ‘을축년(乙丑年) 대홍수’라 불린 1925년 7월의 홍수를 보도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서울은 ‘큰 물 옆(한강변)의 도시’다. 한강은 서울 및 수도권 주민의 생존을 위한 필수 기반이지만, 여름철 집중호우가 내리는 한반도의 기후 여건에서는 범람 위기에 놓이기 쉽다.
20세기 들어 강우량이 늘면서 한강 수위는 매년 높아지는 추세였다. 게다가 일제강점기 미처 충분한 방수시설을 갖추기 전에 용산에 일본군이 상설 군사기지를 짓고 일본인 주거지가 급속하게 형성되면서 당시 용산은 수해의 위험지대가 됐다. 을축년 대홍수 이전 서울의 홍수 피해가 가장 컸던 해는 1920년이다. 그해 여름, 한강의 홍수위가 10m를 넘는 큰 수해가 발생했다. 이에 일제 당국은 경기 가평과 여주에 홍수 예보시설을 마련하고 용산 일대에 방수 제방을 축조했다.
1925년, 비는 7월 9일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큰비가 12일까지 그치지 않았다. 한강 수위가 점점 올라가 마침내 구(舊)용산제방을 넘었다. 1차로 용산 일대 가옥 520여 호가 침수되고 이재민 1380명이 발생했다. 이어서 뚝섬, 마포, 동막(현 마포구 대흥동, 용강동 일대) 등지의 가옥 5000여 호가 침수됐다. 피해는 한강변에 그치지 않았다. 배수시설이 충분하지 않은 도심부의 안국동, 인사동 일대의 가옥 수백 호가 침수됐다. 청량리역 부근의 가옥 35호의 침수도 보고됐다. 그런가 하면 외곽의 장안평(현 동대문구 장안동), 김포의 동양척식회사 농장까지 물에 잠겼다. 이를 을축년 대홍수의 1차 홍수라고 한다.
7월 13일부터 비는 잦아들었다. 이대로 비가 그치면 그나마 피해는 최소화할 듯싶었다. 그런데 15일부터 빗줄기가 다시 굵어졌다. 비는 19일까지 계속 내렸다. 1차 홍수의 피해 복구를 시작하기도 전에 엄습한 2차 홍수의 피해는 더욱 컸다. 신·구용산제방이 붕괴돼 용산우편국, 전화국 등이 모두 침수됐다. 강 건너편 영등포 제방도 붕괴돼 일대 1400여 호가 피해를 봤다. 동쪽 외곽 지역도 홍수의 직격탄을 맞았다. 송파 지역의 가옥 200여 호가 침수됐다는 보고가 있었고 잠실, 신천 일대도 물에 잠겨 주민 4000여 명이 일시 고립됐다. 더구나 용산역과 기관차고 등이 침수되고 한강철교, 인도교가 파괴되면서 대부분의 기차 운행이 중단됐다. 을축년 대홍수는 서울, 경기 지역의 수해를 넘어 전국적 재난이 됐다.
이런 가운데 대홍수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곳이 있었다. (현 용산구) 이촌동이다. 이촌동은 넓은 의미에서 용산에 속하는 지역이지만 철도 바깥쪽의 강변 동네로서 일본인 중심의 신시가지 용산과 구분되는 가난한 조선인 마을이었다. 1920년 홍수 이후 용산의 방수 제방 공사를 할 때 총독부는 그 범위를 철도까지로 설정했다. 따라서 이촌동은 제방 안에 포함되지 못했다. 이촌동 주민들은 지속적으로 제방 증설을 요구했으나 예산 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물론 을축년 대홍수의 강우량은 예상한 정도를 훨씬 넘었기 때문에 방수 제방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제방 바깥에 위치한 이촌동은 홍수 피해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을축년 대홍수 이후 한강 치수사업의 시급함을 느낀 총독부는 1926년부터 980만 원이라는 거액의 예산을 책정해 장기적인 방수공사를 시작했다. 사업 구역은 신·구용산, 뚝섬, 장안평, 마포, 영등포, 양천, 부평, 김포 등 한강변 전역에 걸쳐 있었다. 사업의 최우선 순위는 역시 용산이었다. 1929년 한강 치수사업의 첫 공사로, 이전보다 2.1m 증축한 용산의 새로운 방수 제방이 준공됐다.
그렇다면 이촌동은 어떻게 됐을까. “해마다 여름철을 당하면 홍수의 액을 당하여 인명과 재산에 많은 손해를 당하는 신용산 제방 외의 땅, 즉 동서이촌동에 대하여는 이후에 가옥의 건축을 허락하지 아니할 터이며 그곳의 주민에 대하여는 다른 곳에다가 적당한 대토를 줄는지 혹은 그 땅을 관청에서 매수하던지 무슨 방법을 강구하도록 재등 총독(齋藤實·총독 사이토 마코토)은 언명하였더라.”(조선일보, 1925년 7월 21일)
대홍수 직후 총독부는 이촌동 지역을 보호하기 위한 방수 공사 대신 아예 동네를 없애기로 했다. 총독이 직접 언급했기에 이는 즉각 실현됐다. 이촌동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을 잃고 이듬해까지 총독부가 지정한 마포구 도화동, 노량진 등지로 강제 이주됐다. 서로 지척의 곳이지만 ‘용산’과 ‘이촌동’의 운명은 아주 달랐다.
그러나 이촌동 주민들의 삶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노량진 본동리로 이주한 이촌동 주민들은 새로 정착한 곳을 ‘복흥촌(復興村)’이라고 이름 붙이고 자력 구제 활동에 나섰다. 청년회를 조직하고 강습소를 개설해 자치 활동을 했다. ‘제2의 고향’으로 만들어간 것이다. 1934년에는 삼남(三南) 지방의 홍수로 큰 피해가 발생하자 수해로 고향을 잃은 우리가 그 고통을 더 잘 안다며 의연금을 모금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비록 식민지 권력의 구제 혜택에서는 소외됐지만, 주민들은 자발적인 공동체성을 발휘한 것이다.
서울 송파구 송파근린공원에 있는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 이 기념비는 1926년 당시 지역 주민들이 홍수 피해 희생자를 기리며 면사무소 앞에 세운 것이다. 염복규 교수 제공현재 서울에는 을축년 대홍수의 흔적이 몇 군데 남아 있다. 송파구 송파근린공원에는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가 있다.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 경기 광주군 중대면 관할이었다. 기념비는 1926년 중대면민들이 대홍수 희생자를 기려 면사무소 앞에 세웠다고 한다. 비석의 앞면에는 ‘을축 7월 18일 대홍수 기념’, 뒷면에는 ‘증수(增水) 48척 유실 273호’라고 새겨져 있다. 2차 홍수 때 중대면을 덮친 홍수위가 14.5m에 달했으며, 이로 인해 파괴된 가옥이 273호나 됐음을 알 수 있다.
또 일제강점기 광주군 언주면에 속하는 현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 경내에는 ‘주지 나청호(羅晴湖) 대선사 수해 구제 공덕비’가 있다. 공덕비에는 ‘을축 7월 홍수’, ‘708인 구제’ 등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당시 봉은사 주지였던 나청호 대선사가 사찰의 재산으로 배를 구해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708명을 구한 일을 칭송하는 기념비이다.
송파, 강남 등지의 기념비는 을축년 대홍수의 피해 지역이 한강변 일대에 걸쳐 매우 광범위했음을 알려준다. 당시 대홍수의 피해를 보여주는 사진은 용산 일대를 촬영한 것이 대부분이다. 피해가 크기도 했지만, 용산은 언론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용산역 중심으로 중요한 철도 관련 기구가 모여 있었고, 일본인 시가지가 발달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기념비들은 당대를 재현한 이미지가 보여주지 않는 ‘재현되지 못한 역사’를 꼭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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