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자의 사談진談/신원건]이미지 과잉 시대, 밋밋한 사진에서 편안함을 느끼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23일 2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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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당시 여자 크로스컨트리 경기. 사진 출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당시 여자 크로스컨트리 경기. 사진 출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
신원건 사진부 기자
신원건 사진부 기자
넷플릭스 영화 부문 1위에 오른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서울이 배경이다. 한의사, 선캡 중년 여성, 한양 성곽, 김밥, 민화 호랑이 등 우리에게 익숙한 소재가 다수 등장한다. 한국인은 ‘국뽕’을 느끼겠지만 외국인에게 이런 소재는 호기심을 주는 이국적 소재다. 미국 영화계가 이채로운 로컬 소재를 발굴해 할리우드 세계관으로 구성하는 문화상품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때 얘기다. 올림픽 기간에는 언론 취재를 지원하는 조직이 별도로 운영되는데, 사진기자들을 담당하는 포토매니저들도 있다. 이들 중 한 한국인 포토매니저는 각국 사진기자들과 소통하며 문화권에 따라 묘한 차이를 느꼈다고 한다.

크로스컨트리, 바이애슬론 경기 때가 대표적이다. 설원이 워낙 넓다 보니 사진이 잘 나오는 지점(‘포토 포인트’라고 한다)을 취재 참고사항으로 알려주기 마련인데, 서구권 기자들은 그곳이 ‘소나무 배경이냐’를 꼭 물어봤다고 한다. 질문이 거듭돼 이유를 물으니 ‘그래야 장소가 동아시아 같다’는 것이다. 유럽과 북미에도 소나무는 많다. 하지만 그들 눈엔 소나무가 동양적인, 즉 이국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적합한 소재로 보인 것이다.

반면 한중일 기자들은 주로 자작나무 숲이 배경인 곳을 물었다. 노르딕 경기는 북유럽이 강세라 그런지 북극권 숲의 상징인 자작나무를 찾은 것이다. 한반도에도 자작나무는 자생하지만 노르웨이, 스웨덴 선수들과 어울리는 이국적 풍경으로 여긴 것이다. ‘동아시아=소나무’, ‘북유럽=자작나무’라는 무의식에 가까운 선입견이 작동한 게 아닐까.

사진도 비현실적일수록 ‘그림 같다’는 호평을 받는다. 눈길을 끄는 이미지는 이국적인 풍경, 이색적인 순간, 비현실적인 상황이다. ‘드라마틱하다’는 평을 받는다면 비현실적이지만 재미있다는 뜻이듯.

여기서 사진가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영상과 사진은 가장 사실적인 매체다. 실제를 가장 잘 기록하는 미디어다. 사진은 현실과 사실을 반영하는데도 정작 이색·이국적이며 비현실적인 소재와 순간을 찾고 촬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풍경 사진가는 그냥 아무 때나 촬영하지 않는다. 하늘이 하늘색이 아닌 일출, 일몰 때나 눈이 온 직후 등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애쓴다. ‘결정적 순간’은 사진미학의 기초 주제이기도 하다. 뉴스 사진도 마찬가지다. 뉴스를 소비하는 독자나 시청자 또한 일상적이지 않은 극적인 순간을 원한다. 개가 사람을 물 때 말고 사람이 개를 무는 순간을 찾는다. 문제는 극적인 이미지 또한 소나무와 자작나무처럼 고착된 선입견이 묻어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나 실화를 기반으로 하는 TV 예능 프로그램은 드라마처럼 영상 재현을 한다. 무명 재연 배우 중에서 스타가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이런 재연 영상이 생성형 인공지능(AI)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다소 엉성했던 이전 영상들과 달리 상당한 ‘고퀄’이다. 다큐·시사 프로그램도 편의상 사건 상황을 AI로 재현한다. ‘재연 배우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탄식도 있지만, 나는 다른 점을 우려한다. 밋밋한 영상으로는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기 힘드니 생성형 AI 영상으로 기왕이면 더 화려하고 극적인 장면을 만든다. 비현실적 이미지가 과잉 생산·소비되는 것이다. 요즘 다큐 프로그램의 AI 재현 영상도 비슷하다.

사실 이런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던 것은, 드라마도 아니고 다큐도 아닌 상대적으로 엉성한 재현 영상 때문이었다. 재연 배우들의 다소 어색한 연기와 구성, 아마추어 같은 느낌. 그래서 오히려 영상은 가볍게 보면서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며 볼 수 있었다.

이색·이국적인 이미지를 접하면 처음엔 감탄사가 나오지만 이 자극도 반복되면 지루해진다. 영상 연출과 행사를 위한 연출도 그렇다. 인위적 연출은 상상력에 한계가 있다. 선입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극적이지만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요즘 연출 없는 사진이 주목을 더 받는 경우를 본다. 꾸미지 않고 그냥 있는 대로 툭툭 찍은 듯한 사진. 차분하고 담백하다. 영상 소비자는 이런 사진에 진정성을 느끼기도 한다. 심지어 초점 없이 뿌연 사진을 작품으로 내놓는 사진작가도 있다. 화려한 영상이 익숙한 시대지만 밋밋한 사진에 오히려 편안함이 느껴지는, 사진의 역설이다.

#이미지 과잉#사진 미학#사진 연출#생성형 인공지능#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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