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본질 사이[이은화의 미술시간]〈380〉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23일 2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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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파이프 그림이다. 화가는 분명 파이프를 그렸다. 그런데 파이프 아래에는 프랑스어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썼다. 파이프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이미지의 배반’(1929년·사진)은 사물과 이미지, 단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사물의 이미지를 사물 자체로 동일시하는 우리의 관습에 도전장을 내민다. 실제로 이 그림은 파이프 그 자체가 아니라 파이프를 그린 이미지일 뿐이다. 지금은 마그리트의 대표작이자 초현실주의 미술의 걸작으로 칭송받지만, 이 작품은 처음 발표된 후 수십 년간 마그리트의 경력을 꺾은 실패작으로 여겨졌다.

1929년, 30세의 마그리트는 벨기에 브뤼셀의 한 갤러리와 3년의 계약을 맺었다. 그 덕에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고, ‘이미지의 배반’을 그렸다. 이전에는 광고 포스터를 제작해 생활비를 벌고 있었다. 이 그림은 완성 직후 초현실주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반면 대중은 외면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전시회를 가졌지만,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에 갤러리는 마그리트와의 계약을 끝내버렸고, 마그리트는 생계를 위해 다시 광고계로 돌아가야 했다.

이 그림이 빛을 본 건 작품이 제작된 지 28년이 지난 후였다. 1957년 초현실주의의 후원자 윌리엄 코플리가 작품을 구매하면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코플리가 1978년 경매에 출품한 이 그림을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이 11만5000달러에 사들이며 마그리트의 그림 가치를 증명해 보였다.

이미지는 실재와 다르다. 이미지를 보고 사물이나 사람의 본질을 판단할 수는 없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이미지와 실재의 차이를 망각하는 순간 이미지에 배신당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넘어 본질을 보라고, 무엇이 진짜인지 질문하라고 권한다.

#르네 마그리트#이미지의 배반#초현실주의#파이프 그림#이미지와 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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