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초등학교 중퇴 학력에 50대까지 공사판 잡역부로 일해 온 이숙희 씨 사연을 기사화한 적이 있다. 이 씨는 50대부터 초중고 검정고시를 거쳐 2년제 대학에 진학했고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 나이 60에 딸이 원장으로 있는 한의원에 취업했다. 기사가 나간 지 반년쯤 뒤,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싶다며 방법을 물어 왔다. 친분이 있던 출판사 몇 군데에 타진해 봤지만 여의치 않았다. 출판계가 워낙 어려워 ‘돈 될 일’ 아니면 손댈 여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비 출판이 아니면 어려울 것 같다”고 조언하며 내심 안쓰럽고 미안했다.
한 시대를 살아낸 개인의 역사=민중의 역사
그런데 최근 이 씨가 “드디어 책이 나왔다”고 연락해 왔다. ‘굳세었다! 숙희야’란 제목에 장정도 소박한 200여 쪽 분량. 자신의 삶을 담담하고 진솔하게 전하며 ‘가슴속에 묻어둔 꿈이 있다면 당장 무엇이건 시작하라’고 권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책 에필로그와 추천사 모두 그의 가족과 친지가 썼다는 점. 에필로그는 딸이, 세 개의 추천사는 오랜 친구와 며느리, 아들이 각각 썼다. 그럴싸한 직함의 군더더기 같은 추천사가 없다는 점이 오히려 그들의 독립심과 순수함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한땀 한땀 정성으로 만든 ‘가족 자서전’에서 역사를 이끈 민중의 힘마저 느껴졌다. 이 책은 30대 대표가 운영하는 자서전 전문 출판사 ‘이분의 일’에서 나왔다. 출판사 이름은 국민 절반이 회고록 쓰는 날까지 일하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기자는 2021년 6월 ‘노인 한 명의 죽음은 도서관 한 개가 사라지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시니어들에게 자서전 쓰기를 권하는 칼럼을 썼다. 자서전이건 회고록이건 쓰는 사람은 갈수록 늘어나는 듯하다. 독서 인구가 줄어 ‘이러다 책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많은 거 아니냐’며 걱정하는 세태지만, 그럼에도 책 쓰기는 권장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이가 읽지 않더라도 본인에게는 ‘내가 살았다’는 기록을 남기는 의미가 있고, 가족과 친지에게도 좋은 정신적 유산이 될 수 있다. 이 씨의 경우도 온 가족이 두고두고 얼마나 기뻐할까를 생각하면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노인 한 명 죽음은 도서관 하나 사라지는 것
개인의 역사는 하나하나 모여 한국 현대사가 된다. 개개인의 자서전이 살아 있는 민중사의 데이터베이스가 될 수도 있다. 인류가 지금의 인류일 수 있었던 힘은 후세에게 기록을 남기고 기억을 전수한 것에서 나왔다. 문자와 인쇄술은 그 힘을 폭발적으로 키워 줬다.
원로 언론인 조갑제 씨가 최근 부쩍 ‘전 국민 회고록 쓰기 운동’을 주창하고 있다. 대선 전후 두 차례 만난 이재명 대통령에게도 이를 제안했고, 대통령도 공감을 표했다고 한다.
조 씨가 2022년 10월 김진현 전 과학기술처 장관 회고록 ‘대한민국 성찰의 기록’을 읽고 한 월간지에 쓴 글 말미에도 같은 주장이 나온다. 김 전 장관은 사회지도층으로 살며 겪은 일들을 650여 쪽 분량에 담은 회고록 머리말서부터 기록에 소홀한 한국 지도층 인사들을 ‘역사적 의무를 포기했다’고 비판했다. 조 씨는 이를 받아 “기성세대는 연륜에 새긴 저마다의 회고록, 피가 흐르는 진짜 교과서들을 다 토해 놓고 사라져야 한다”며 “60세 이상 국민을 대상으로 회고록 쓰기 운동을 제창한다”고 썼다.
당시 두 사람의 초점은 사회지도층 회고록을 통해 대한민국 정체성과 정통성을 찾는 일에 맞춰져 있었다. 그만큼 거창하지 않더라도 무명인들의 민중사는 만들어질 수 있다. 다만 국가가 주도하는 ‘범국민 운동’ 형태가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다. 이 씨처럼 개인의 자발적인 회고록 정리가 먼저이고, 국가는 도움이 될 만한 정보나 플랫폼을 제공해 주는 정도가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