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서울 종로구 사직터널을 지나 교남동 한적한 도롯가에 있는 주한스위스대사관은 올 때마다 감탄과 함께 생경한 감정을 품게 되는 곳이다. 마을버스를 타고 내리면 바로 건너편에 돈의문 북쪽 성곽이 펼쳐지고, 대사관 뒤로는 이 동네 ‘대장’이라는 2500여 가구의 브랜드 아파트가 수직으로 뻗어 있다. 대사관 부지 역시 17m까지 건물을 올릴 수 있지만 스위스 측은 수직의 위용 대신 수평의 포근함을 택했다. 땅의 많은 부분을 마당으로 빼고, 그 뒤에 한옥에서 영감을 받은 목구조 건물이 단정하게 들어섰다. 높이를 놓고 아득바득 경쟁하지 않는 품격이 있달까. 녹색숲만 도심의 허파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니 이곳에 들어설 때부터 큰 숨을 쉬는 것 같은 평화와 아늑함을 느낀다. 이곳의 공식 애칭은 ‘스위스 한옥’이다.
최근 이곳에서 뜻깊은 북토크가 열렸다. 대사관에서 문화공보담당관으로 근무했던 윤서영 씨가 1년 6개월간의 취재 끝에 ‘스위스 예술 여행’이라는 책을 냈다. 대사관 측은 첫 북토크의 무대로 기꺼이 대사관의 문을 열었다. 아름다운 대사관도 볼 겸 스위스 예술 여행에 대한 감흥도 들을 겸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했다.
행사는 2021년 주한 스위스대사로 부임한 다그마 슈미트 타르탈리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었다. 함께한 직원을 위해 대사관의 문을 연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물을 수 있지만 내게는 무척 특별하고 정겹게 보였다. 그 나라의 문화에 지위 높은 사람에게만 다정한 위계와 수직이 배어 있다면 이런 수평적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윤 씨도 스위스의 가장 큰 매력으로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는 ‘수평적 문화’를 꼽았다. 일찍이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스위스는 26개의 주(州)가 자치 행정을 한다. 상징적 수도는 베른이지만 편의상 그러할 뿐,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정해진 수도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스위스에 또 하나 없는 것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다. 행정부 장관 7명이 1년 임기로 돌아가면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구조라 협치가 절로 이뤄진다. 재작년 스위스 출장을 갔을 때 들은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한 말은 이것이었다. “스위스인들은 지금 대통령이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아요. 계속 바뀌기도 하고,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요.” 공식 언어도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만슈어 등 4개다. 둘이 만나면 어떤 언어가 편한지를 묻고 그 언어로 의사소통을 한다.
이 모든 내용은 책 ‘스위스 예술 여행’에 담겨 있다. 윤 씨는 주한 스위스대사관에서 일하며 인연을 맺은 스위스의 명사 38명을 인터뷰했다. 그들이 들려주는 스위스 문화는 물론이고 “바다 빼고 다 있다”는 말을 들을 만큼 세계적 강소국이 된 비결, 꼭 가봐야 할 스위스 명소를 400여 쪽에 충실하게 담았다. 인터뷰이 중에는 세계적 건축가 페터 춤토르와 마리오 보타, 막강한 영향력의 아트 컬렉터 울리 지그도 있다. 윤 씨의 말에 따르면 스위스 인구는 대한민국의 약 6분의 1이지만 문화 예산 규모는 한국의 2배다. 예술과 문화야말로 모두에게 ‘수평적’으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란다. 무더웠던 어느 여름날, 서울에 있는 스위스의 공간에서 진정한 선진국이란 어떤 모습이고 방향이어야 하는지 잠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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