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넷플릭스의 미국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는 기본적으로 뮤지컬 영화다. K팝 걸그룹 ‘헌트릭스’가 세상의 악한 기운을 노래로 물리친다는 서사가 주축이라 다양한 사운드트랙이 나온다. 덕분에 애니메이션의 폭발적 인기에 힘입어 영화음악들도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애니메이션 속 노래는 비트나 멜로디 측면에서 기존 K팝의 특징을 잘 살렸다. 극 중 악마들조차 흥얼거리며 “중독성 있다”고 인정할 정도다. 가장 인기 있는 곡은 빌보드 싱글차트 4위를 기록한 ‘골든(Golden)’. 결점을 감추는 데 급급했던 주인공이 고음을 내지르며 ‘더 이상 두려움 속에 숨지 않겠다’고 노래하는 모습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의 ‘렛 잇 고(Let It Go)’를 연상시킨다. ‘골든’은 이 곡이 기록했던 빌보드 최고 순위(5위)를 이미 뛰어넘었다.
그런데 ‘골든’을 이처럼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는 또 다른 킬링 포인트는 의외의 곳에 있다. 바로 한 줄씩 감칠맛 나게 섞인 한국어 가사다. 이 작품은 K팝과 한국 문화를 소재로 하지만, 미국 제작진이 만든 미국 애니메이션이다. 당연히 모든 게 영어로 제작됐는데, 가사에서 갑자기 한 줄씩 한국어가 툭툭 나온다. “Up, up, up with our voices 영원히 깨질 수 없는 Gonna be, gonna be golden”식이다.
맥락상 그 대목에서 한국어가 나와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무심히 섞인 한국어 한 구절이 전체 곡과 신비스러운 조화를 이루며 입에 착 감긴다. 특히 한국인들이 이 대목에서 전율을 느끼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만 해도 한국 대중문화에서 영어가 ‘정확히 그런 효과’를 내기 위해 사용돼 왔기 때문이다.
2010년대만 해도 국내에선 대중가요 가사에 쓰인 영어나 외래어의 영향, 효과나 문제점에 관한 대중문화 연구가 많았다. 이 무렵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대중가요 50% 이상이 영어를 섞어 썼다. 주로 곡 분위기 전환, 후크나 후렴구의 운율을 위해서였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메시지를 은어처럼 전달하는 용도로도 활용됐다.
요컨대, 대중가요 가사에서 영어는 대부분 차별화의 방편이었다. 더 그럴듯한 곡을 만들기 위해, 더 정통성 있어 보이기 위해 가사 곳곳에 때로는 무분별할 정도로 섞어 썼다. 문화사대주의나 우리말 파괴라는 지적이 심심찮게 나왔던 이유기도 하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반대 상황이 온 것이다.
헌트릭스의 다른 히트곡 ‘하우 이츠 던(How It‘s Done)’이나 이들과 대결하는 저승사자 보이밴드인 사자보이스의 ‘소다 팝(Soda Pop)’ 등도 마찬가지다. “불을 비춰” “지금 당장 날 봐” 같은 한국어 구절이 K팝의 정통성과 힙함을 살려내는 장치로 쓰인다. 애니메이션 대사에선 “가자 가자” “후배” 같은 한국말을 그대로 쓰며 ‘찐’한국 느낌을 과시한다. 이쯤 되면 세계가 열광하는 ‘K콘텐츠다움’을 완성하는 마지막 터치는 한국어가 된 게 아닌가 싶다. 공고한 언어 패권마저 흔들 수 있는 문화의 힘이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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