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칼럼]한국 자동차, 죽느냐 사느냐의 나흘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27일 2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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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車 美 진출, 日 업체 집요한 방해
3000만 대 돌파 눈앞에 두고 관세 폭탄
‘트럼프 관세’ 태생부터 한국에 불리
1%P라도 日보다 높으면 큰 재앙

천광암 논설주간
천광암 논설주간
“일본이 마치 못된 시누이처럼 행세하면서 방해를 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의 미국 시장 진출 ‘D데이’를 1년쯤 앞두고 준비 작업이 한창이던 1985년 1월, 당시 정세영 사장이 했던 말이다.

현대차의 미국 진출은 한국 자동차 산업 70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세 장면을 꼽으라고 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한 장면이다. 당시 미국은 전 세계 자동차 판매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초거대 시장이었던 데다, 전 세계 모든 메이저들이 자존심을 내걸고 총력전을 벌인 격전장이었다. 현대차에는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하지만 미국 시장의 벽은 높았다. 무엇보다 소형차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업체들의 ‘텃세’가 보통 아니었다. 일본 업체들은 이미 현지 생산 기지까지 구축하고 미국 시장에 연간 300만∼350만 대를 판매하던 시절이다. 일본은 브랜드-품질-마케팅 모든 면에서 현대차를 압도하는 상황이었지만, ‘잠재적 경쟁자의 싹을 미리 밟아 버리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집요한 방해 공작을 펼쳤다.

그럼에도 현대차는 특유의 뚝심으로 미국 시장을 끈질기게 파고들어,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왔다. 지난해에는 현대차와 기아를 합해 171만 대를 팔아 연간으로 사상 최대 판매실적을 올렸고, 미국 진출 39년째를 맞은 올해는 ‘누적 3000만 대 판매 달성’을 예약해 둔 상태다.

이처럼 ‘기념비적 순간’을 앞두고 있지만, 동시에 현대차는 미국 시장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기도 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트럼프 관세’ 때문이다. 트럼프 관세는 존재 자체가 본질적으로 미국이나 일본 업체들에 비해 한국 업체들에 불리한 구조다.

지난해 미국 시장 판매량 순위는 GM, 도요타, 포드, 현대차·기아, 혼다의 순이다. 그런데 5개사의 현지 생산 비율을 보면 현대차·기아만 45%로 절반에 못 미치고, 나머지는 최소 55%에서 최고 99%에 이른다. 미국 업체는 논외로 치고, 설령 한국과 일본에 동일한 관세율이 적용되더라도 관세율의 절대 수준 자체가 높으면 미국 밖 생산비율이 높은 현대차·기아가 불리한 구조인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은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도 일본의 뒤를 쫓아가는 처지다. 현재 25%인 관세율을 일본 수준인 15%까지 낮추지 못하면 한국의 자동차는 일본 자동차에 비해 결정적인 열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가격에서 밀리면 브랜드와 품질로 압도해야 하는데,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미일 간의 관세 협상 합의 내용만 보더라도 일본이 미국 자동차 시장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진심’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일본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쌀 시장을 내준 데서 그치지 않고, 5500억 달러(약 750조 원)에 이르는 대미 투자 보따리까지 풀었다. 아니, 풀었다기보다는 갖다 바쳤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일본은 ‘내 지시에 따라’ 미국에 5500억 달러를 투자할 것이며, 미국은 수익의 90%를 가져갈 것이다”는 것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SNS에 올린 내용이다.(미일 간에 구체적인 합의 내용을 둘러싼 설왕설래가 있지만, 막무가내 떼쓰기로 일본이 트럼프 대통령을 당해낼 리 만무하다.)

일본이 이런 굴욕적인 조건까지 감수하면서 합의를 한 것은 일본의 국익에 있어서 미국 자동차 시장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있어서 미국은 최대 수출시장, 자동차는 최대 수출 품목이다.

이런 사정은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은 전체 수출의 19.9%를 미국에 의존하고, 한국이 18.7%를 미국에 의존한다. 전체 수출 품목으로는 반도체가 1위지만, 미국 시장만 보면 자동차가 압도적인 1위 수출 품목이다. 더구나 한국은 무역의존도가 높아 수출에 변고가 생기면 전체 경제가 심하게 흔들리는 구조다. 지난해 기준으로 일본의 무역의존도는 35.6%였는데 한국은 그 두 배가 훨씬 넘는 90.9%에 이른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건 관세 협상 ‘데드라인’까지는 4일이 남았다. 우리 경제구조를 고려하면, 미국 시장을 잃은 한국 자동차 산업은 생각할 수 없고, 자동차 없는 수출은 존립할 수 없으며, 수출이 무너진 한국 경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미국 자동차 시장을 잃은 한국 경제는 바퀴 하나가 빠진 자동차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대미 협상팀은 ‘일본보다 1%포인트라도 불리한 관세를 받아 들고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갖고 협상에 임해야 한다. 39년간 일본 업체들과의 피 터지는 경쟁 끝에 어렵게 개척한 미국 자동차 시장이 이번 협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오점을 남겨서는 절대 안 된다.

#현대자동차#미국시장#일본업체#관세협상#자동차수출#트럼프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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