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사건 없이도 울림이… 삶을 닮은 클래식[허명현의 클래식이 뭐라고]

  • 동아일보

코멘트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가장 감동을 받을 때는 언제일까.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폭발적인 사운드를 만들어 낼 때? 유명한 성악가가 공연장 천장을 울리는 고음을 낼 때? 그런 장면들도 물론 인상 깊지만, 내가 진짜 울컥하는 순간은 다른 데 있다. 누군가의 일상을 닮은 음악을 들을 때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움직인다. 감동은 생각보다 화려한 장면에서 오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평범한, 정직한 감정에서 온다. 마치 내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프란츠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를 처음 들었을 때가 그랬다. 이 곡은 말 그대로 ‘겨울에 길을 떠나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실연의 아픔을 안고, 눈 내리는 들판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남자의 내면을 24개의 노래로 그린 작품이다. 놀랍게도 여기엔 대단한 서사가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걷는다. 발걸음은 무겁고, 바람은 차갑다. 눈은 그치지 않고 내린다. 누구에게도 그 감정을 내보이지 못한 채, 혼자 걸어간다. 그 모든 상황이 특별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감정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이 지극히 평범하고 정적인 음악에서 깊은 감정을 느낀다. 그 이유는 아마 우리에게도 그 길이 낯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한 번쯤은 그런 겨울을 통과해 봤으며, 마음이 추운 날을 겪어 봤다. 삶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막막한 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괜히 쓸쓸한 하루가 있다. 그런 날이면 평소와 똑같은 길도 더 외롭고, 낯선 풍경처럼 느껴진다.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하고, 그저 혼자서 그 감정을 감당해야 하는 날이 있다. 슈베르트는 그런 날을 꾸밈없이 노래했다. 설명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조용히 꺼내 보였다. 그래서 더 마음에 남는다.

이 곡의 다섯 번째 곡인 ‘보리수’는 전체 연가곡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노래다. 보리수는 사랑을 속삭이던 나무지만, 이제는 주인공에게 ‘여기서 쉬었다 가라’라고 속삭인다. 따뜻한 유혹처럼 들려도, 사실은 삶을 멈추라는 무언의 권유일지도 모른다. 나그네는 그 유혹을 뿌리치고 다시 눈보라 속을 걸어간다. 이 짧은 노래 안에는 얼마나 많은 감정이 담겨 있을까. 우리의 삶 속에도 그런 순간들이 있다. 어떤 형태로든. 쉬고 싶고, 그만두고 싶은 유혹 앞에서 스스로를 다잡았던 순간들. 그러한 감정을 슈베르트는 단 4∼5분의 노래로 그려냈다. 그것도 단지 성악과 피아노만으로.

‘겨울 나그네’의 마지막 곡인 ‘거리의 악사’는 이런 여정을 마무리하는 노래다. 거리를 떠돌며 악기를 연주하는 노인을 보면서 주인공은 그에게 말을 걸어볼까 망설인다. 노래는 그렇게 끝난다. 아무 결론도, 위로도 없다. 이야기의 끝도 열려 있다. 가만 보면 그게 바로 삶이다. 우리의 하루하루가 언제나 마무리되는 건 아니다. 어떤 감정은 해소되지 않은 채 끝나기도 하고, 어떤 질문은 대답 없이 남기도 한다. 그저 그런 하루가 쌓여 간다.

우리는 흔히 클래식 음악이 어려운 이야기, 비범한 감정, 화려한 기교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면도 있다. 하지만 클래식이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이유는, 그 안에 우리의 일상이 있기 때문이다. 출근길에 떠오른 옛 기억, 바람 부는 오후의 쓸쓸함, 해 질 무렵 노을을 보며 느끼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리움, 무언가를 잃어버린 뒤 찾아온 공허함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감정을 솔직하게 담아낸 음악이 오히려 더 많이 공감받고, 더 오랫동안 남는다. 그래서 나는 ‘겨울 나그네’ 같은, 작다면 작은 곡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대단한 장면을 보여주진 않지만, 우리 안의 조용한 겨울을 꺼내준다.

이 음악은 꼭 겨울이 아니어도 듣기에 좋다. ‘겨울 나그네’는 단지 겨울 음악이 아니다. 그것은 계절을 넘어선 마음의 풍경이다. 어떤 계절에도, 어떤 순간에도, 우리 안에는 늘 작고 조용한 겨울이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슈베르트는 그 겨울을 너무도 솔직하고 꾸밈없이 노래했다. 그렇기에 이 음악은 계절이 바뀌어도 여전히 감동을 준다. 대단한 사건이 없어도, 드라마틱한 전개가 없어도 우리는 ‘겨울 나그네’ 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 큰 울림을 얻는다.

#클래식#울림#감동#겨울 나그네#프란츠 슈베르트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