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공연·예술축제 ‘아비뇽 페스티벌’이 내년 공식 초청언어(Guest Language)로 한국어를 선정하자 많은 이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중국어와 일본어를 제치고 아시아권 언어 최초로 선정된 부분에 의미 부여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콧대 높은 세계 주류 무대에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드러낼 기회가 왔다는 것이었다. 방탄소년단(BTS), 기생충, 오징어게임,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이어진 ‘K컬처의 승리’가 재현되리라는 기대감도 생겼다. 프랑스에서 느낀 ‘국뽕의 순간’이었다. 아비뇽, 韓 문화 과시하는 자리 아냐
하지만 아비뇽 측의 설명은 사뭇 달랐다.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뽐내라는 차원의 선정이 아님을 강조했다.
아비뇽 페스티벌은 2022년부터 ‘언어를 통한 문화 다양성 복원과 극단주의 극복’을 목표로 공식 초청언어 제도를 도입했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게 세계인의 갈등과 반목을 극복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2022년 첫 초청언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영어였다. 영미(英美)권 주류 문화를 조명하자는 취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 영국, 캐나다, 필리핀 등 영어 사용권 국가들이 지닌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공유하며 극우적 시각과 지역 우선주의를 극복해 보려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 공을 들였다.
올해의 초청언어인 아랍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랍어권을 하나의 문화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실제로는 국가 간 문화적 차이는 상당하다. 아비뇽은 아랍 언어권 내부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드러냄으로써 극단적이고, 획일적인 시각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했다.
그렇다면 아비뇽은 왜 남북한을 합쳐 1억 명도 채 사용하지 않는 한국어에 주목했을까. 숫자상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중국어, 일본어 등을 제쳐두고서 말이다.
티아구 호드리게스 아비뇽 페스티벌 예술감독은 한국 문화의 다양성과 보편성에 주목했다고 한다. 한국 문화가 하나의 색이 아니라 프리즘에 비춘 빛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어 세계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의 의도에 따라 한글이 익히기 쉽게 설계된 점도 문화 수용성을 높이는 요인일 것이다. 실제로 파리의 한글학교에는 대기가 필요할 정도로 수강자들이 몰리고 있다. “일단 진입하면 배우기 쉽다”는 반응이 많다고 한다.
한국 문화가 세계인과 만났을 때의 변주와 확장성도 아비뇽이 주목하는 지점이다. 일례로 노벨문학상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이탈리아 유명 연출가 다리아 데플로리안에 의해 연극으로 만들어져 유럽 각지에 깊은 울림을 줬다. 내년도 아비뇽 페스티벌에서도 한국어를 매개로 한 유럽 예술가의 작품이 대거 소개될 예정이다. 주최 측은 남한과 북한을 아우를 수 있는 작품 발굴에도 관심이 많다.
‘국뽕’ 덜고 ‘다양성 확장’에 집중해야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명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 됐을지 모른다. 가장 한국적인 문화를 세심하게 살려가야겠지만, 내셔널리티를 강하게 드러내면 조금은 촌스러워지는 상황이 돼 버린다. 한국적인 것을 강조할수록 배타적이라는 지적이 나올 수 있고, 해외 문화계의 반감을 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미 ‘K한류’에 대한 집착, 나아가 콘텐츠의 산업적 성공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는 전략이 극소수의 콘텐츠만 살리고, 문화 다양성을 훼손시킬 수 있단 우려가 나온다. K콘텐츠의 산업적 측면을 중시한다는 평가가 나오는 네이버 출신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대한 우려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세계는 BTS가 ‘한국 문화’여서가 아니라, BTS 그 자체에 열광하고 있다. BTS란 그룹의 개성과 수준 높은 음악에 박수를 치는 것이다. 이제는 국뽕을 조금 덜고 아비뇽이 주목했던 우리 문화의 다양한 숨결에 한번 집중해 보면 어떨까. 한국 문화는 K 수식어나 화려한 포장 없이도 세계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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