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칼럼]尹의 속옷으로 가릴 수 없는 李의 책임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8월 5일 2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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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관세+α 다 챙긴 뒤 “당선 축하”
李, 이빨 흔들리며 “국력이 필요” 절감
기업 내쫓는 자해적 규제로 가능한가
反 기업 입법 막든가 거부권 행사해야

이진영 논설위원
이진영 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과의 관세 협상 타결을 소셜미디어로 전하며 “새 대통령의 선거 승리를 축하한다”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한 지 두 달이 지났는데 공개적인 축하는 처음이라니 놀랍다. 그것도 관세를 0%에서 15%로 올리고, 3500억 달러 투자금 받고, 미국산 에너지 1000억 달러 사주기로 했다는 얘기 끝에 나온 축하 인사다. 이건 당선 축하용일 뿐이니 잘 보이려면 더 내놓으라 보내는 협박 문자 같다. 이 대통령은 “이빨이 흔들려” “국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국정 기조를 전면 수정하겠다는 뜻일까.

이 대통령은 상충하는 국정 목표를 제시해 왔다. 하나는 ‘억강부약 대동세상’이다. 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도와 대동세상을 이룬다는 건 좌파 운동권의 오랜 염원이다. 농업을 숭상하고 상업을 천시하며 가난해도 평등한 작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한물가도 한참 간 유교적 왕도정치에 뿌리를 둔 국정 철학이다.(함재봉 ‘한국 사람 만들기’)

다른 하나는 ‘실용적 시장주의 정부’다. 최근 비상경제점검 회의에선 “기업 활동을 격려하고 지원하는 정부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대동세상 운운하는 586 운동권과는 다른 면모다. 이 대통령의 성남시장 재직 시절 롤모델이 이명박(MB) 전 대통령이었다는 유동규 씨의 법정 증언도 있다. 서울시장을 지낸 MB가 청계천 복원을 발판으로 대통령이 됐듯 이 대통령도 제2의 청계천 같은 랜드마크를 성남에 남기려고 애썼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사법 리스크로 기소되고도 실용적이고 목표 지향적인 이미지 덕에 대통령이 됐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새 정부의 국정 방향은 세계 수출 5위국 위상에 걸맞지 않게 억강부약 대동세상 쪽으로 기울고 있는 듯하다. 관세 협상부터 그렇다.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도 쌀과 소고기 추가 개방을 하지 않은 것을 큰 성과로 꼽았다. 그 대신 기업의 부담이 커졌을 것이다. 관세 협상 결과 한국의 투자 부담은 올해 정부 예산의 70% 규모로 한국은행 외환보유액(4100억 달러)에 육박한다. 이 중 상당 부분이 기업 몫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농업 비중은 2%, 제조업은 27.6%다. 작은 시장 지키자고 큰 시장에서 양보했으니 억강부약이 아니라 소탐대실 아닌가. 미국에 몰아주고 나면 한국에 투자할 여력이 있겠나.

여당은 노란봉투법과 ‘더 센’ 상법 개정안을 이번 달 안에 일방 처리할 태세다. 수백, 수천 개 되는 협력업체와 1년 내내 협상 테이블에 묶여 있을 자신이 없거나, 가중될 경영권 위협이 싫으면 한국을 떠나라고 등 떠미는 ‘경제 폭망법’이다. 지난 좌파 정부가 노동 약자들에 ‘저녁이 있는 삶’을 주겠다며 도입한 주 52시간제가 ‘저녁밥 없는 삶’ ‘투잡 공화국’으로 귀결됐듯, 반기업법들은 부족한 일자리마저 날려버릴 것이다. 이번 대미 투자 계획 3500억 달러가 실행되면 일자리 160만 개가 미국으로 옮겨갈 것이라는 추산도 있다. 청년 취업자 수가 368만 명, 청년 백수가 56만 명이다. 160만 일자리 빼면 뭐가 남나.

이 대통령은 올 5월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 가서 “노무현 정신 이어받아 대동세상 만들겠다” 했는데, 노 전 대통령은 청와대로 간 뒤론 “세계 시장의 변화를 내다보는 큰 장사꾼의 안목”으로 달라졌다. 이번 관세 협상을 계기로 재평가받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타결하고 이라크 파병으로 한미 동맹을 강화했다. 친중 위정척사파들이 고집했던 대동사회는 구한말 부국강병을 목표로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들에 국권을 침탈당하면서 평가가 진즉에 끝난 시대착오적 망국의 구호임을 알았을 것이다.

이 대통령도 국력을 키우겠다면 선택지는 분명하다. 대동세상은 잊어라. 규제지옥, 혁신천국이다. 자해적인 반기업 입법을 말려야 하고 통과된다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 ‘더러운 평화’가 어떤 평화를 말하는지 모르지만 전쟁을 피하고 싶다면 평화를 말하기보다 이겨놓고 싸울 생각을 해야 한다.

관세 협상이 타결되자 바로 앞서 협상을 마친 일본, 유럽연합(EU)과 비교 분석하는 국내외 평가가 잇따랐다. 전임자 기저효과 덕에 정시에 출근만 해도 일 좀 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 대통령으로선 ‘허니문 끝났구나’ 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이다. 이제 시작일 뿐, 당장 이달 안에 트럼프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하고 나면 새 정부의 적나라한 실력이 드러날 것이다. 어떤 성적표를 받아 들진 몰라도 ‘전임 대통령 속옷 차림 논란’ 같은 이슈로 물타기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관세 협상 타결#트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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