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패권 언어 된 ‘인도-유럽어족’… 그 배경엔 말과 전차가 있었다[강인욱 세상만사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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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태어나 진화하는 언어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한국인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과목은 뭘까. 아마도 영어와 같은 외국어가 아닐까. 유럽 문화권에서는 3, 4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옆동네 가듯 쉽게 국경을 넘고 다양한 민족이 어울려 사는 사회·문화적 배경도 있지만, 그들이 속한 언어체계 자체에서도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유럽에서 중동, 인도,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 신장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지역에 분포된 언어들을 살펴보면 문법과 어순, 어휘 구조가 놀랄 만큼 비슷하다. 이를 ‘인도유럽어족’이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전 세계 인구의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이 어족에 속한 언어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이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인도서 시작된 인도-유럽어 연구

우크라이나 헤르손 지역에서 발굴된 고대 유목민 유골을 바탕으로 복원한 고대 인도-유럽인의 모습. 말과 마차를 사용한 유목인들이 유라시아 대륙 곳곳으로 확장해 다른 민족과 섞이는 과정에서 유럽어의 뿌리인 ‘인도-유럽어족’이 기원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 헤르손 지역에서 발굴된 고대 유목민 유골을 바탕으로 복원한 고대 인도-유럽인의 모습. 말과 마차를 사용한 유목인들이 유라시아 대륙 곳곳으로 확장해 다른 민족과 섞이는 과정에서 유럽어의 뿌리인 ‘인도-유럽어족’이 기원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역사언어학’은 언어의 기원을 밝히는 학문이다. 수천 년 전 쓰인 언어가 오늘날 어떻게 분화·변화됐는지를 연구한다. 지금은 인정되지 않지만, 한국어가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는 주장도 바로 역사언어학적 연구에서 나왔다.

역사언어학은 세계 인구의 약 50%가 사용하는 ‘인도-유럽어족’을 기반으로 연구, 발전했다.인도유럽어족 연구의 시작은 서양의 대항해시대와 그 뒤를 이은 18세기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에서 비롯됐다. 서양인들은 자신들이 쓰는 언어가 인도같이 먼 지역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786년 영국 판사 윌리엄 존스는 산스크리트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이 문법과 어휘에서 유사성이 크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 언어들이 하나의 언어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근대 이후 유럽에서 민족국가가 등장하고 ‘민족’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비슷한 언어의 사용은 순수한 민족을 찾아낼 주요 단서처럼 여겨졌다. 이를 통해 인도-유럽어족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일부 학자는 인도-유럽어를 ‘우월한 민족의 상징’으로 봤고, 나치 독일은 이를 ‘아리안족’ 신화와 결합해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로 악용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고유전학은 이런 신화를 철저히 무너뜨린다. 고대 DNA 연구는 인도-유럽어의 확산이 단일 순혈 민족이 아닌 수많은 혼합과 이동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인도-유럽어의 기원은 초원

고고학은 인도-유럽어의 기원에 대한 실마리를 풀었다.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교수로 활동한 여성 고고학자 마리야 김부타스(1921∼1994)는 1956년 인도-유럽어를 쓰는 지금의 유럽인이 6000년 전 흑해∼카스피해의 초원에 살던 유목민으로부터 기원했다는 ‘쿠르간 가설’을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서구 유럽학계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세계적인 선진 문명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서구 유럽인이 러시아 남부의 유목민으로부터 기원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후 콜린 렌프루 같은 영국학계는 유럽인의 기원이 유목민이 아닌 약 7000년 전 아나톨리아 반도의 농경민들이라고 주장했다. 또 인도-유럽어족이 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유럽으로 퍼졌다고 했다. 1980, 90년대에 렌프루의 설은 유력한 대안으로 널리 영향력을 발휘했다. 학문적인 논증 이전에 당시 유럽과 소련이 극한으로 대립하던 시기였던 사회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 없었다.

종교, 기술과 함께 유라시아 확산

올해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한 연구는 수백 구의 고대 인골 DNA를 분석해 유럽인이 약 6000년 전 카프카스-볼가강 하류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이 지역 주민들이 초기 유목문화를 받아들였고, 그중 일부가 아나톨리아(현 튀르키예)로 이동해 초기 인도-유럽어가 확산됐다는 시나리오다. 물론 언어와 유전은 동일하지 않지만, 김부타스의 스텝 기원설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고고유전학적 근거로 평가된다.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세운 최초의 제국 히타이트 전차 전투 조각상. 사진 출처 강인욱 교수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세운 최초의 제국 히타이트 전차 전투 조각상. 사진 출처 강인욱 교수
인도-유럽어의 기원은 약 6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정작 널리 확산된 이유는 아나톨리아의 고대 문명과 관련돼 있다. 4000년 전 이 지역에서 등장한 히타이트 제국은 최초의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세운 제국이었다. 히타이트는 유라시아 초원에서 군사, 금속제련술, 전차 등을 도입했다. 특히 전차의 제작과 운용에는 고도의 기술과 말을 다루는 법이 필요했다. 이를 배우는 과정에서 새로운 언어와 용어도 함께 전파됐다. 3600년 전에 만들어진 히타이트 아니타왕의 문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도-유럽어 기록물이다.

현존 가장 오래된 인도-유럽어 기록인 ‘아니타왕의 문서(아니타 텍스트)’ 일부. 기원전 약 17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출처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현존 가장 오래된 인도-유럽어 기록인 ‘아니타왕의 문서(아니타 텍스트)’ 일부. 기원전 약 17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출처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인도-유럽어는 동아시아로도 확산됐다. 불교 연구에 필수적인 산스크리트어(범어)도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인도로 전차 문화를 전파한 아리안족이 기원전 15세기경 ‘리그베다’라는 경전을 남겼고, 여기에서도 전차가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한다. 이후 불교에서 전차 바퀴는 깨달음과 윤회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일부 학자는 전차를 의미하는 ‘차(車)’와 꿀을 의미하는 ‘밀(蜜)’의 고대 발음이 인도-유럽어에서 기원했다는 주장도 내놓는다.

동아시아로 확산된 인도-유럽인은 실크로드에 남아 계속 거주했다. 그들은 ‘토하르인’이라 불린다. 이들은 서기 10세기경까지 잔존하며 실크로드에서 교류를 담당했다. 이렇듯 언어는 순수하게 한 줄기로 이어진 것이 아닌 다양한 기술과 문화 교류 속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했다.

왜 동북아 언어는 서로 다른가


인도-유럽어는 서로 비슷하지만 서로 외모와 문화가 비슷한 동북아시아의 여러 민족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 다른 언어체계를 지녔다. 아직도 학계에선 한국어와 일본어의 어족에 대해 논쟁 중이다. 한국인과 DNA는 물론 생활 풍습이 비슷한 만주족마저도 실제 언어에서 유사성이 적다. 동아시아는 서로 인접하고 인구도 많지만, 지형·생태의 다양성과 역사적 분절로 인해 언어가 크게 분화했다. 반면 초원지대는 이동과 교류가 비교적 쉬워 언어적 수렴과 확산이 빠르게 일어났다.

사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볼 수 있다. 외국어를 모르는 어르신들도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외래어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최근 경기 분당시 판교 정보기술(IT) 업계 종사자들의 독특한 말투가 일명 ‘판교 사투리’로 불리며 화제가 됐다. 비슷한 원리일 것이다.

근대 이후 인도-유럽어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 배경에는 서양의 패권 이외에도 표음문자 및 기술과 관련된 단어들이 유사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최근 주요 2개국(G2)으로 자리 잡은 중국을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다. 중국어 사용자는 15억 명에 달하지만 대부분 중국 내에 거주한다. 또한 한자는 중국 외 한국과 일본에서만 사용한다. 중국은 갑골문자에서 이어지는 상형문자를 그대로 발달시킨 역사성을 자랑하지만, 디지털 환경에서는 입력 효율이 낮다. 그래서 중국인은 메신저를 쓸 때도 대개 한자를 직접 입력하지 않고 메시지를 녹음해 전송하는 식으로 소통한다. 그 결과 중국의 젊은 세대는 펜을 잡아도 글을 쓸 수 없는 상태(提笔忘字·컴퓨터 세대의 신문맹화를 상징하는 중국 표현)를 보이고 있다. 최근 인공지능(AI)이 급격히 발달하면서 이런 상황이 더욱 가속화된다면 향후 몇 세대 안에 사실상 한자 필기가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AI 시대, 한국어의 미래 전략

인도-유럽어는 광범위한 어근 공유와 파생 구조, 정보화에 유리한 알파벳의 특성, 그리고 방대한 디지털 자료를 바탕으로 AI 시대에도 강세를 유지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한국어 역시 자모 분해·조합 구조와 높은 표기 효율성, 한자 문화권에서 비롯된 어휘적 깊이를 동시에 갖춘 드문 언어다. 최근 K컬처의 확산은 이런 장점을 세계로 퍼뜨리고 있다.

인도-유럽어의 기원 연구는 궁극적으로 언어가 순수한 집단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이동·혼혈·기술 교류 속에 만들어짐을 밝혀냈다. 변화와 융합이야말로 언어의 본질이다. 초원을 달린 말과 전차가 언어를 실어날랐듯, 오늘날의 AI와 디지털 네트워크도 언어의 지형을 재편하고 있다. 인도-유럽어의 장구한 여정을 이해하는 일은 변화하는 글로벌 환경 속에서 한국어의 미래 전략을 세우는 데 중요한 통찰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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