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로 일군 AI 인프라 제국… 칩-SW 양 날개로 엔비디아에 도전장[최중혁의 월가를 흔드는 기업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8월 19일 2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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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반도체 새 강자 ‘브로드컴’

최중혁 팔로알토캐피탈 대표
최중혁 팔로알토캐피탈 대표
《“엔비디아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월가의 투자자들이 인공지능(AI) 반도체 하면 엔비디아만 떠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한 기업이 이런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바꿔놨다. 브로드컴(AVGO)이다. 15일 기준 지난 1년간 주가가 84%나 상승했다. 올해 들어서는 미국 증시 성장을 주도해온 7개 빅테크인 이른바 ‘매그니피센트7(M7)’ 중 테슬라의 시가총액을 훌쩍 넘어 새로운 M7로도 꼽힌다.》

월가에서는 브로드컴을 “AI 시대의 새로운 승자”라고 평가한다. 브로드컴이 엔비디아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으면서 급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가 범용 그래픽처리장치(GPU)로 AI 학습 시장을 휩쓸고 있다면, 브로드컴은 고객 맞춤형 AI 칩으로 새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현 브로드컴은 전략적 M&A 산물

브로드컴을 이해하려면 이 회사의 복잡한 역사를 들여다봐야 한다. 오늘날의 브로드컴은 사실 원조 브로드컴과 이를 인수한 싱가포르 아바고 테크놀로지스의 합작품이다.

원조 브로드컴은 1991년 헨리 새뮤얼리 미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교수와 제자 헨리 니컬러스 3세가 창업한 통신용 반도체 회사로 시작됐다. 1998년 기업공개(IPO) 당시 직원 320명의 작은 회사였다. 하지만 인터넷 붐과 함께 팽창하며 2000년 전후 공격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종합 통신 반도체 기업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2016년 아바고에 370억 달러(현 환율 기준 약 51조4300억 원)에 인수되며 25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

여기서 주목할 인물이 말레이시아 출신의 혹 탄이다. 그는 2006년 아바고의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했다. 아바고는 HP에서 분사한 애질런트의 반도체 사업 부문을 인수해 만든 사모펀드 소유 회사였다. 탄은 냉철한 비용 절감과 전략적 M&A로 회사를 키웠고, 2016년 브로드컴 인수 후 회사명을 브로드컴으로 바꾸며 새 브로드컴을 탄생시켰다. 이 때문에 회사명은 브로드컴이지만 미 증시에 상장된 회사의 약어는 ‘AVGO’인 특이한 상황이 연출됐다.

이후 브로드컴은 역대급 M&A로 몸집을 불려 나갔다. 2018년 CA테크놀로지스(189억 달러), 2019년 시맨텍 기업 보안 사업부(107억 달러), 2023년 VM웨어(610억 달러) 인수 등을 실행했다. 이를 통해 단순한 반도체 회사에서 반도체와 소프트웨어를 아우르는 종합 인프라 기업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브로드컴은 2024년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돌파했고, 2025년 8월 기준 미 6개 빅테크와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에 이어 세계에서 8번째로 큰 기업이 됐다. 현재 브로드컴은 원조 브로드컴의 통신 반도체 DNA, 아바고의 정밀한 운영 노하우, 탄의 과감한 M&A 전략이 결합돼 AI 시대에 최적화된 인프라 기업으로 완성됐다.

반도체社? AI 인프라 통째 제공


이제 브로드컴을 단순한 반도체 회사로 본다면 착각하는 것이다. 이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의 정체성은 반도체 솔루션과 인프라 소프트웨어라는 두 개의 강력한 축으로 이뤄진다. 반도체 부문에서는 네트워킹, 브로드밴드, 스토리지, 무선통신용 칩을 설계하고 제조한다. 특히 아이폰에 탑재되는 무선통신 칩 공급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 분야에서 쌓은 수십 년의 기술력과 경험은 AI 시대 맞춤형 칩 설계에서 핵심 경쟁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 지난해 완료된 VM웨어 인수를 통해 확보한 소프트웨어 부문이 클라우드 인프라와 가상화 솔루션을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VM웨어는 가상화 기술의 선구자로, 전 세계 대부분의 데이터센터에서 사용되는 핵심 인프라 소프트웨어를 제공한다. 2024 회계연도 기준 브로드컴의 연간 매출에서 반도체 부문은 58%, 소프트웨어 부문은 42%를 차지했다.

브로드컴의 AI 관련 매출은 2025년 회계연도 기준 2분기(2025년 5월 4일 종료) 44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46% 급증하며 9개 분기 연속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는 전체 매출의 4분의 1을 넘는 수준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AI 매출의 40%가 AI 네트워킹 솔루션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이는 브로드컴이 단순히 AI 칩만 만드는 게 아니라, AI 시스템 전반에 필요한 인프라를 통째로 제공하고 있다는 뜻이다.

브로드컴의 AI 비즈니스는 구글과 같은 하이퍼스케일러들을 위한 맞춤형 반도체(ASIC)와 AI 데이터센터 간 연결을 위한 네트워킹 칩으로 나뉜다. AI 모델이 복잡해질수록 여러 서버 간의 빠른 데이터 전송이 생명인데, 브로드컴의 이더넷 스위치와 네트워킹 칩이 이 역할의 핵심을 담당한다.

애플-구글의 AI 전략 파트너로

브로드컴의 경쟁력은 더 이상 단순 부품 공급에 머물지 않는다. 이 회사는 하이퍼스케일러들과 함께 ASIC 칩을 공동 설계하는 진정한 파트너로 진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구글과의 협력이다. 구글은 자체 AI 칩인 텐서처리장치(TPU)를 설계할 때 브로드컴과 수년간 긴밀히 협력해 왔다. 브로드컴은 단순히 칩을 제조해 주는 게 아니라 칩 설계와 검증, 고속 인터커넥트 설계, 패키징 등 여러 단계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공급업체와 고객의 관계를 넘어선 전략적 파트너십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소식이 있었다. 애플이 구글의 TPU를 사용해 자사의 AI 모델을 학습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그동안 엔비디아의 GPU가 AI 모델 학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빅테크가 엔비디아 GPU 이외의 AI 칩을 사용한 사실상 첫 사례다. 2024년 말엔 애플이 브로드컴과 협력해 자체 AI 서버용 AI 칩을 개발 중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시장에서는 이러한 애플의 행보가 빅테크의 탈(脫)엔비디아 행렬을 가속화하는 신호탄이 될까 주목하고 있다.

‘反엔비디아’ 전선 선두주자 될까

AI 시장이 성장하며 맞춤형 칩에 대한 수요도 늘 수밖에 없기 때문에 브로드컴의 미래는 밝다는 관측이 많다. 5세대(5G)와 6G 통신 기술의 발전도 브로드컴의 성장동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회사가 보유한 무선통신 칩 기술은 차세대 통신 표준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도 만만치 않다. 가장 큰 우려는 고객 집중도다. 브로드컴의 AI 매출 상당 부분이 몇몇 빅테크에 의존하고 있다. 만약 이들 고객이 자체 칩 개발 능력을 키우거나 다른 공급업체로 전환한다면 타격이 클 수 있다. 실제로 구글과 아마존은 자체 AI 칩 개발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어 중장기적으로는 브로드컴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가능성이 있다.

엔비디아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엔비디아는 ‘NV링크’로 대표되는 자체 네트워크 표준을 고수하며, AI GPU를 중심으로 자사 표준을 더욱 확장하려 한다. 브로드컴의 강력한 네트워크 솔루션들과의 경쟁이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럼에도 투자자들에게 브로드컴은 AI 혁명에 참여하면서도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는 매력적인 선택지다. 엔비디아 대비 상대적으로 저렴한 밸류에이션과 안정적인 배당 정책은 보수적인 투자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다. 반도체 업계의 변동성과 고객 집중도 리스크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AI의 장기적인 성장 흐름에서 브로드컴의 포지션은 견고해 보인다.

엔비디아는 AI 시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브로드컴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AI 혁명의 핵심 인프라를 구축해 가고 있다. ‘반(反)엔비디아 전선’의 핵심축으로 부상한 브로드컴이 AI 시대의 새로운 제왕으로 우뚝 설 수 있을까.

필자(최중혁)는 미국 미시간대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은 뒤 삼성SDI America, SK Global Development Advisors 등을 거쳐 미 실리콘밸리 소재의 사모펀드 팔로알토캐피탈(Palo Alto Capital)을 설립해 운용하고 있다. ‘트렌드를 알면 지금 사야 할 미국 주식이 보인다’ ‘2025-2027 앞으로 3년 미국 주식 트렌드’ 등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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