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유종]20년간 산재 줄인 싱가포르… 예방에 무게 두고 책임 공유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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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이유종 정책사회부 차장
2004년 4월 20일 싱가포르 도시철도 공사현장에서 터널이 무너지며 인근 니콜고속도로 길이 100m 구간이 붕괴됐다. 현장에 있던 4명이 숨지고 3명이 크게 다쳤다. 부실 설계와 안전규정 미비, 현장 소통 부재가 빚어낸 참사였다. 사고 조사위원회는 보고서에 “예방 가능한 사고였다”고 기록했다.

이듬해 싱가포르 정부는 ‘작업현장 안전과 보건 2015’ 로드맵을 발표하며 10년간 산업재해 사망자를 절반 이하로 줄이는 장기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당시 싱가포르 인구 10만 명당 산업재해 사망자는 4.9명이었다. 2006년 3월에는 안전보건 의무 위반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는 작업장안전보건법이 제정됐다. 다만 처벌보다는 예방에 무게를 뒀다. 사고가 발생하면 해당 기업에 벌점을 부과하고 누적 점수가 일정 수준을 넘으면 채용, 입찰 등에 불이익을 가했다. 입찰과 채용이 중단되면 기업은 경영상 상당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어 산업재해 예방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고위험 업종엔 맞춤형 규제를 하고 노사정이 안전책임을 공유하며 장기 프로젝트는 단계별로 목표를 설정해 추진했다. 그 결과 2015년에는 인구 10만 명당 산업재해 사망자가 1.9명까지 하락하며 목표치를 크게 웃돌았다. 지난해엔 1.2명까지 떨어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상위권에 올랐다. 반면 한국의 경우 인구 10만 명당 산업재해 사망자는 3.9명이다.

사실 한국과 싱가포르는 노사 관계, 산업 구조, 정부 형태, 사회적 분위기 등이 크게 달라 일률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싱가포르는 단일노총 중심 협력형 구조이고 상대적으로 제조업 비중도 낮다. 장기 집권한 정부는 강력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유도했고 해당 정책을 20년 넘게 꾸준히 추진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싱가포르 인력부는 올해 상반기에도 건설업과 제조업 등 514개 현장을 점검해 안전수칙 미준수 사례 1263건을 적발했다.

2022년 1월 사망 등 중대 산업재해가 발생했을 때 사업주, 경영책임자에게 징역형 등을 내리는 중대재해처벌법이 도입된 뒤 정부는 관련 예산과 인력을 2, 3배로 늘렸다. 기업도 처벌을 우려해 산업안전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다. 하지만 민간에 이어 공공 부문에서도 중대재해가 발생할 정도로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엄벌하는 데 몰두했고 기업은 처벌을 면하는 데 관심을 가졌으며 정작 현장에서 안전에 유의해야 할 근로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현장이 움직일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 싱가포르에서 트럭크레인 사고가 빈번하자 싱가포르 정부는 안정성 제어장치를 설치할 때 비용의 50%를 환급해주는 방식으로 사고를 줄였다. 중대재해가 발생한 기업에 대출 한도를 줄이기보다는 안전관리를 잘한 기업에 대출 한도를 늘려주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노사정이 한 테이블에 모여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사고 예방을 위한 구체적 로드맵도 만들어야 한다. 14일 고용노동부 장관 주관으로 정부 관계자와 20대 건설사 경영진이 모여 중대재해 감축 방안에 대해 토론했지만 막상 현장 목소리를 전달할 근로자는 보이지 않았다. 정부와 기업, 노동계가 책임을 공유하고 처벌보다는 예방에 초점을 맞춰 입체적인 해법을 마련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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