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피플 in 뉴스]“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55년 전 전태일의 외침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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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근로자들이 추락, 끼임 등 산업재해로 산업 현장에서 숨지는 사고가 잇따라 뉴스에 크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가 공사 현장에서 감전 사고를 당한 일도 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한국 산업화의 그늘을 증언하며 노동 운동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전태일(1948∼1970·사진)입니다.

전태일은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17세에 서울 평화시장 재단 보조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빠른 손놀림과 성실함으로 남들보다 일찍 재단사가 되었습니다. 1960년대였던 그때 그는 공장에서 열악한 노동 환경을 목격합니다. 여공들은 환풍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좁은 공장에서 하루 15시간씩 일하며 폐렴을 앓고 피를 토하기도 했습니다. 전태일은 산업재해를 당한 동료가 부당하게 해고되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그는 열악한 노동환경과 턱없이 낮은 임금, 인간의 존엄이 무너지는 노동 현장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어렵게 근로기준법을 독학했습니다. 1969년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결성했고, 1970년 ‘삼동친목회’를 만들어 노동자의 목소리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근로기준법은 책 속에서만 존재했습니다. 정부는 노동 실태 조사와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했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앞길에서 전태일은 껍데기뿐인 법을 고발하기 위해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준비했지만, 경찰과 경비의 제지로 무산됩니다. 그러자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외침을 남기고 자기 몸에 불을 붙여 22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전태일의 죽음은 당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대학생과 지식인, 노동자들이 비로소 열악한 노동 현실을 사회 문제로 직시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외침은 산업 안전 제도를 개선하고 노동권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20년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습니다.

1960년대 열악한 노동 환경을 딛고 대한민국은 반세기가 지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장은 안전한지, 법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지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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