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칼럼]美 제 발등 찍는 트럼프의 이민정책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9월 7일 2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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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이민’ 단속에 英 국방예산 2배 투입
이번 조지아 한국 배터리공장 급습
투자하고 일자리 만들었더니 뺨 때린 격
美 이민정책 안 바뀌면 경제에 큰 짐 될 것

천광암 논설주간
천광암 논설주간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법안의 별칭이다. 하지만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와는 달리 ‘미등록 이민자’들에게는 대재앙을 예고하는 법안이었다.

이 법안의 핵심 내용 중 하나는 미등록 이민자 단속·추방 및 국경 장벽 보강을 위해 1500억 달러(약 208조 원)의 예산을 투입한다는 것이었다. 1500억 달러는 세계 3대 군사 강국인 영국의 연간 국방예산보다 2배나 많은 금액이다. 이를 무기로 이민세관단속국(ICE)은 인력을 대폭 충원한 뒤 이민자 사회를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넣는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는 중이다.

단속 방식도 거칠어서 인권 침해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학교 앞에서 잠복을 하고 있다가 자녀들을 등교시키기 위해 오는 부모를 덮치거나, 영주권 심리를 위해 법원에 출석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미등록 이민자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명분은 ‘안전’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장서서 “우리나라에 테러리스트, 살인자, 강간범, 폭력 범죄자, 갱단 조직원들이 있다”, “이란 암살 조직보다 1400만 명의 불법 이민자가 더 두렵고 걱정스럽다” 등 미등록 이민자와 중범죄자를 동일시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이민자들에 대한 증오와 적대감을 키워 자신의 지지층을 결속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전혀 사실이 아니다. 20년 넘게 이민과 범죄의 관련성을 연구한 범죄학자 그레이엄 오지와 카리스 쿠브린에 따르면, 이민자 비율이 높은 지역일수록 범죄 발생률이 낮으며, 살인과 같은 폭력 강력범죄는 그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등록 이민자 추방과 함께 합법 이민을 억제하는 정책도 병행하고 있는데, 이 같은 정책은 미국 경제에 장기적으로 큰 상처를 남길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순수 미국인 노동자의 고령화와 은퇴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민 노동자의 고용 시장 유입이 감소하면 연 2% 수준인 미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1.5%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구체적인 분석도 나온다.

이민이 미국 경제의 혁신을 이끄는 엔진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는, 굳이 복잡한 통계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미국에서 혁신의 상징으로 통하는 7대 빅테크(일명 ‘M7’) 최고경영자(CEO) 중 4명은 이민자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은 대만, 알파벳(구글)의 순다르 피차이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는 인도,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이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트럼프 행정부의 난폭하고 패쇄적인 이민정책이 두고두고 미국 경제에 큰 후유증을 남길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특히 이번 미국 이민 당국의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법인의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에 대한 급습은 ‘제 발등 찍기’의 결정판이 될 수밖에 없다. 현대차그룹이 조지아주 한 곳에서만 창출하는 직간접 일자리는 연간 4만 개가 넘는다. 또한 한국 기업들은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1500억 달러의 대미 추가 투자를 약속한 터다.

그런데도 이민 당국은 헬기와 장갑차까지 동원해 중범죄자를 단속하듯이 했고, 공장 가동을 앞두고 막바지 작업을 위해 한국에서 파견된 근로자 300명을 무더기로 체포해서 구금시설에 강제 수용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테러리스트, 살인자, 강간범, 폭력 범죄자, 갱단 조직원’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미국 이민 당국은 비자 자격을 문제 삼지만, 공장 건설에 필수적인 인력을 본국에서 보낼 수 있는 길은 사실상 막아놓고 투자를 하라는 것은 우리 기업들을 ‘불법 리스크’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고 뭔가.

더구나 특정 사업장을 덮쳐서 토끼몰이 식 단속을 하는 것은 전임 조 바이든 정부 때는 전혀 볼 수 없던 방식이다. 제조업 환경에 적합하지 않은 조지아주가 우리 기업들의 투자처로 주목을 받은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관대하고 유연한 이민자 정책이었는데, 우리 기업들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여유를 주지 않고 단일 사업장 기준으로 사상 최대 규모의 단속 작전을 벌인 점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어떤 기업이 미국에 흔쾌히 투자를 하려고 하겠는가. 트럼프 행정부가 지금의 이민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제조업 부활’은 고사하고, 이미 미국에 진출한 기업들마저 발길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번 사태가 미국 제조업의 쇠락을 가속화시키는 결과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민정책#국방예산#미등록 이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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