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0년 9월 11일 신숙주, 여진 정벌 승전보를 알리다[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 동아일보

코멘트
신숙주 초상. 국가유산청 제공
이문영 역사작가
이문영 역사작가
조선 초기, 북방 문제는 큰 골칫거리였다. 세종은 4군과 6진을 개척했다. 이 말은 여진의 땅을 빼앗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조선은 여진과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세종 다음인 문종 때에는 여진과 내왕이 없을 만큼 찬바람이 불었다.

세조 집권 당시 건주여진의 추장 이만주가 내조를 청했다. 대신들은 명나라의 눈치가 보여 반대했지만, 세조는 과감하게 이를 허락했다. 심지어 평안도 길을 따라 한양으로 오도록 조치했다. 적의 수장에게 국내 요충지를 다 살펴볼 기회를 준 셈이다. 세조의 유화책으로 북방의 소요는 가라앉았다. 명나라는 이런 조선의 조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이민족 통치술로 생각한 명나라는 조선의 유화책을 중지시키려 했다. 세조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겉으로는 명의 조치를 따르는 척하면서 뒤로는 화친 정책을 이어갔다.

하지만 여진과의 화친이 파탄에 이르는 사건이 생겼다. 명이 모련위(毛憐衛)라고 명명한 두만강 이북의 추장 낭발아한(浪孛兒罕) 때문이었다. 조선은 모련위를 오랑캐라고 불렀다. 낭발아한은 명나라에서도 관직을 받아 의기양양해하고 있었다. 조선은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낭발아한도 조선이 자신을 홀대한다고 반발했다. 결국은 명나라에 몰래 아들을 보내려 획책하던 것이 발각돼 조선은 이들 부자를 모두 처형했다. 조선은 공공연히 반감을 드러내는 강력한 부족의 우두머리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낭발아한의 아들 중 하나가 달아났다. 그는 조선에 복종하는 추장들을 제거한 뒤 병력을 모아 조선 공격에 나섰다. 세조 즉위 후 처음으로 벌어진 여진과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오랑캐는 조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는 한 달 만에 전사했다. 하지만 이는 조선에 좋은 명분이 됐다. 세조는 오랑캐를 멸망시킬 때가 왔다고 여겼다. 이를 위해 함길도 도체찰사로 북방의 사정을 잘 파악하고 있던 신숙주를 파견했다. 신숙주는 4월 10일에 여진 정벌 계획안을 올렸다. 이에 따라 정벌군이 조직되기 시작했는데 뜻밖의 변수가 생겼다.

명나라에서 여진과 화친하라며 사신을 보내온 것이다. 물론 조선은 이 말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무조건 무시할 수도 없었다. 사신은 조선의 입장에 불쾌해하며 떠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대신들은 여진 정벌에 부정적이었다. 세조는 신숙주에게 현장에서 결정하라며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신숙주는 지금이 정벌의 적기라고 말하며 정벌을 단행했다. 그는 8000여 명의 군을 네 개의 부대로 나눠 신속하게 여진 부락을 일거에 타격한 뒤 9월 11일 세조에게 승전 보고를 올렸다. 이 일로 여진 추장들은 일제히 조선에 복종했다. 이후에도 조선은 여진을 상대로 화전 양면책을 구사했다.

신숙주는 사육신의 난 때 동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아내가 그 일로 자살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지만, 그의 아내는 사육신의 난 이전에 병사했다. 신숙주는 정치, 군사, 외교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가 일본을 다녀온 뒤에 쓴 ‘해동제국기’는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친 명저다.

#조선#명나라#북방#여진#여진 정벌#신숙주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