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S가 혼자 제주에 머물며 혼술 바를 다녀온 경험을 들려줬다. 혼술이야 아무 데나 가서 혼자 마시면 혼술이지, 굳이? 자칭 ‘프로 혼술러’의 반골 기질이 꿈틀거렸다. 그런데 얘기를 듣다 보니 그건 ‘혼자’보다는 ‘혼자들’을 위한 설정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혼자 오고, 테이블 구조 자체가 낯선 이들과 둘러앉는 형태라 대화를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찾아보니 비슷한 곳이 여럿 있었다. 리뷰 하나가 눈에 띄었다. “혼자 마시기 딱 좋은, 하지만 외롭지 않은 곳.” 이것 또한 하나의 트렌드였다.
한국 정서상 ‘혼자’도 쉽지 않지만, ‘혼자들’이 되기는 더욱 어렵다. ‘스몰 토크(small talk)’가 일상인 서구권과 달리, 우리 사회에서는 낯선 개인들이 서로 연결되는 일이 어지간해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의 이야기를 가장 잘 들어줄 사람은 여행자’라는 말이 있다. 모르는 이와의 대화에서 영감과 위로를 받은 기억 하나쯤은 누구나 떠올릴 수 있기에, 어쩌면 이곳에서도 그런 행운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한 혼술 바로 향했다. 명목은 ‘트렌드 탐방’이었고, 미리부터 기대한 이 경험의 가제는 ‘혼자들의 밤’이었다.
내가 간과한 것은 지역의 특수성이었다. 여행자가 많은 도시와 서울 한복판의 일상 공간은 결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 앳된 친구들의 질문에 “결혼한 지 십 년 됐어요”라고 답하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내 화제는 ‘꿈’으로 옮겨갔다. ‘이상형 월드컵’보다는 훨씬 반가운 주제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유사업계에서 인턴십을 하고 있는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진지하게 눈을 반짝이며 꿈을 이야기했다. 그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것도 경우에 따라 실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조용히 짐을 챙겨 나왔다.
도망치듯 향한 곳은 인근의 단골 바였다. 임신과 출산을 거치다 보니 마지막 방문이 벌써 1년도 더 전이었다. “어머, 오랜만이에요!” 들어서자 사장님이 반겨주셨다. 경기가 안 좋긴 안 좋은지, 한때 직원이 몇이나 있던 공간이었는데 지금은 사장님 혼자 운영하고 계셨다. 편안한 공간, 편안한 사장님. 오랜만에 찾은 아지트가 오랜만에 만난 벗만큼이나 반가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 하소연하듯 ‘혼술 바’의 실상을 알렸다. “아니, 아무 데나 가서 혼자 마시면 혼술이지. 아니에요, 사장님?” “요즘 친구들은 그런가. 멍석을 깔아줘야 하나.”
그러나 알고 있었다. 스스로의 나이듦과 트렌드 변두리로 밀려남을 자각한 밤, 그 상처를 합리화하기 위한 푸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기대한 것은 ‘혼자들의 밤’이었지만, 그밤 그 공간에서 혼자는 나뿐이었다. 대신 오랜만에 찾은 아지트에서 사장님과 늦게까지 대화를 나눴다. “이거 제 노동주인데, 드셔 보실래요?” 이름조차 휘황찬란한 칵테일을 마시는 대신, 오래된 와인을 마시며 이상형과 꿈이 아닌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느슨한 일상을 이야기했다. 조금 더 비싼 술과 조금 덜 반짝이는 이야기. “와, 맛있네요!” 술은 나이를 먹을수록 비싸진다. 그 사실이 묘하게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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