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련 칼럼]대법원장 겨냥 폭로가 일깨운 미디어 환경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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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호적 유튜브 찾아나선 정치인
권력자에게 던지는 앵커의 질문
①“어디서 알았나” ②“왜 사실인가”
미래 공론장 바꿀 앵커-뉴스소비자

김승련 논설실장
김승련 논설실장
더불어민주당 소속 서영교, 부승찬 의원이 꺼내든 조희대 대법원장 비밀회동설은 여러 이유에서 충격적이었다. 회동설 폭로와 함께 사법부 수장의 중도 사퇴를 요구할 정도였는데, 많은 게 허술했다. 30년 전 박계동 의원은 비자금 의혹을 제기하면서 은행 자료라도 흔들었지만, 이번엔 AI 변조 가능성까지 거론된 음성파일이 사실상 전부였다. 당 내부에서도 대놓고 말은 못 해도 외면하는 기류가 형성됐다고 한다.

부 의원은 폭로 며칠 뒤 지상파 라디오에 출연해 같은 주장을 폈다. 국회에서 한 일방적 폭로가 아니라 방송사 앵커를 마주한 자리였다. 부 의원은 확실한 근거가 있는지 묻는 질문을 3, 4개 받았다. 앵커는 “제보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 아니냐”고까지 물었다. 대법원장이 ‘이재명 사건은 대법원에서 알아서 처리한다’고 말했다는 문제의 그 오찬 모임 참석자 4명의 면면을 볼 때 뭔가 어색하다는 지적이었다. ‘폭로 전에 이런 상식적 의문을 따져 보지 않았느냐’는 질책처럼 들렸다.

세상이 뒤숭숭할 때는 말이 먼저 흔들린다고 했는데, 우리 공론장과 미디어 지형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정치인들은 전통적 언론을 피하고 있다. 언론학자들이 쓰는 ‘언론 회피(바이패싱·Bypassing) 저널리즘’ 현상이다. 부 의원도 지금쯤 이런 생각을 갖게 됐을지 모르겠다. 정치인들은 우호적 유튜브를 더 찾는다. 12·3 계엄 직후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이 주적(朱赤)이 동색인 같은 편 유튜브를 방문해 탄핵 반대 여론전을 시작했다. 그는 “유권자들이 1년 후에는 다 찍어준다”고 했다.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았는데, ‘같은 편’인 유튜버는 그 문제적 발언을 들으면서 경고음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끼리끼리 같은 편의 집단사고가 특징인 유튜브에선 생각의 힘이 작동할 공간이 좁다.

TV건 유튜브 매체건 진행자 역량이 더없이 중요해졌다.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조국혁신당 조국 당시 대표는 여러 유튜브에 출연했다. 조 대표는 당시 “입시 문제로 잘못했으니 처벌받을 것이다. 하지만 권력형 비리는 1건도 없었다”는 취지로 말했다. 필자가 직접 본 영상 3, 4건에서 비슷한 논지를 폈다.

채널 진행자들은 수긍한다는 뜻인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그 주장은 사실일까. 그는 민정수석 시절 유재수 금융위 국장의 비리 정황을 포착하고도 정치인들 부탁을 받고 눈감아줬다가 유죄 판결을 받았다. 여러 번 보도된 대로다. 진행자들은 “그럼 유재수 건은 권력형 아닌가요”라고 질문했어야 했다. 당시 진행자들이 정파적 동질감 때문에 반박하지 않은 것인지, 단순히 타이밍을 놓쳤던 것인지 알 길은 없다. 시청자들은 ‘조국이 억울했겠다…’는 인상을 받았을 개연성이 있다. 방송의 공공책무와 무관한 유튜브라지만, 공론의 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축을 차지하게 된 지금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취재기자도 그렇지만 미디어 진행자는 권력자에겐 부담스러운 존재일 때 토론 문화는 활기를 띤다. 정치인들은 자신만의 통계와 사례를 앞세워 일방적 주장을 펴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그런 숫자나 사례를 어디서 듣고 알게 된 건가요” “당신 주장이 사실이라는 근거가 어떤 건가요”를 물어야 한다. 좋은 앵커와 그렇지 않은 앵커는 위 두 질문을 하느냐, 아니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느냐로 구분된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까지 들을 때 시청자들은 정치적 판단을 더 분명하게 할 수 있다.

한국의 공론장은 사실 5000만 국민의 상수원 같은 존재다. 우리는 까다로운 기준을 만들어 생활하수가 스며들지 못하게 상수원 수질을 관리한다. 같은 이유로 정치인들이 팩트를 비틀거나, 사실과 의견을 뒤섞어 말할 때 공론장 참여자들은 수질 감시인처럼 나서야 한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의견인지 생선 살에서 가시를 발라내듯 가려내야 한다. 언론과 유튜버의 구분이 모호해진 마당에 이런 책무는 기자든, 평론가든, 개그맨이든 진행자라면 느껴야 한다.

정치 공론장 참여자는 정치인, 매체 진행자, 뉴스 수용자 3축이다. 지금은 정치인의 변화 촉구를 기대하기 힘든 시기다. 앵커의 분발만으로도 부족하다. 결국 시청자들이 앵커를 냉정하게 평가할 때가 됐다. 정치인이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펴는데, 왜 반박성 질문이 안 나오는지를 따져야 한다. 앵커가 꼭 필요한 질문으로 공론을 풀어갈수록 이를 지켜본 시청자들은 좋은 정치와 언어에 대해 더 높은 기준을 세우게 될 것이다. 시청자들의 높은 공론 기대치는 결국 정치인들이 반응하도록 하는 유인이다. 3축이 함께 움직이는 그때가 오면, 난공불락 같던 공론장에도 진짜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서영교#부승찬#조희대#대법원장#비밀회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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