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25전쟁 당시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만큼 병사들을 두렵게 만든 것은 원인 모를 열병이었습니다. 고열과 두통, 신부전과 출혈로 숱한 생명을 앗아간 이 병은 이미 1940년대 만주에서 유행했지만 정체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습니다. 세계의 석학들조차 풀지 못한 난제를 결국 한국인 과학자가 밝혀냅니다. 바로 이호왕 박사(1928∼2022·사진)입니다.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 의대를 거쳐 미 미네소타대에서 일본뇌염 바이러스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67년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유행성출혈열 사례를 접하면서 그의 연구 인생 방향이 전환되었습니다.
그는 1970년부터 7년간 유행성출혈열을 옮기는 등줄쥐를 쫓아 들판을 누비며 병원체 추적에 매달렸습니다. 야밤에 들쥐를 잡다 무장간첩으로 오해받기도 했고, 동료가 바이러스에 감염돼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1976년 그는 열병의 원인 바이러스를 분리하는 데 성공합니다. 발견지인 한탄강 이름을 따 ‘한탄 바이러스’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어 서울 마포구 집쥐에서 ‘서울 바이러스’를 발견했고, 북유럽 신장염 원인도 한탄 바이러스임을 입증했습니다. 마침내 미지의 전염병이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백신 개발에 뛰어들었습니다. 무려 12년간 연구한 끝에 백신을 완성했고, 스스로 접종해 효과도 입증했습니다. 1990년 ‘한타박스’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이 백신은 대한민국 신약 개발 1호로 기록되었습니다. 이어 여러 계통의 한탄 바이러스에 작용하는 종합 백신을 내놓았습니다.
세계도 그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 유행성출혈열 연구협력센터 소장을 지냈고, 미국 바이러스학회는 ‘이호왕 연사 제도’를 만들어 업적을 기렸습니다. 2019년 국제바이러스분류위원회는 ‘한타바이러스과’를 공식 명칭으로 삼았고, 2021년에는 노벨 생리의학상 후보에도 올랐습니다.
한국의 가을은 유행성 출혈열을 특히 조심해야 하는 계절입니다. 야외 나들이 후 반드시 손을 씻으라는 경고가 가을에 유독 많이 보이는 건 이 병 때문입니다. 총성이 멎은 전쟁터에서 집요한 연구와 헌신으로 한국 의학과 바이러스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이호왕 박사의 이름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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