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천 전 국가정보원 국장스파이는 적국 방첩망을 피해 임무를 완수하고자 다양한 스파이 기술(Tradecraft)를 구사한다. 그중에서도 정보 활동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은 비밀 연락이다. 기원전 고대 그리스는 이미 이런 기술을 썼다. 노예의 머리에 문신으로 메시지를 새겨 머리카락이 다시 자란 뒤 파견하거나, 특정 굵기와 모양의 나무봉에 감아야 문장이 드러나는 암호 도구를 사용했다. 비밀 연락의 역사는 그만큼 오래됐다.
안전한 연락망을 확보하는 일은 첩보 활동의 성공뿐 아니라 스파이의 생명을 좌우한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전설적 스파이 엘리 코헨이 시리아에서 활동 중 발각된 것도 무선통신이 노출된 탓이었다.
입수한 첩보와 본부의 지령을 은밀히 주고받는 방법은 스파이 세계의 영원한 숙제다. 그래서 각국 정보기관은 그 시대 최고의 기술을 동원해 비밀 연락 장비를 개발해 왔다. 1970년대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만든 ‘버스터(Buster)’가 대표적이다. 당시 CIA는 소련 정보총국(GRU)의 드미트리 폴랴코프 장군을 이중 스파이로 포섭했지만, 비밀 연락이 쉽지 않았다. 결국 낚싯대처럼 위장한 통신장비를 만들어 전달했는데, 멀리 떨어져 낚시를 하며 대화와 메시지 전송이 가능했다. 당시 기준으로 최첨단이었고 작전도 대성공을 거뒀다.
스파이들의 가장 오래된 비대면 연락 수단은 ‘드보크(Dvoke)’라 불리는 무인 포스트다. 특정 장소에 서신이나 장비를 숨겨 두면 상대가 몰래 회수한다. 과거엔 산속이나 외딴 지역이 주로 쓰였지만, 요즘은 도심의 물품 보관함도 활용된다. CIA는 한때 죽은 동물 사체를 이용하기도 했다. 비둘기나 쥐의 내장을 파내 돈과 문서를 넣고 꿰맨 뒤 길가에 버려두면 겉보기엔 자연스러워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엔 디지털 통신 기술이 판을 바꿔 놓았다. 디지털 장치가 내장된 돌, 이른바 ‘스파이 스톤’을 공원에 갖다 놓으면 요원이 산책하듯 지나가며 스마트폰 블루투스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 길을 걷다 버튼만 눌러도 비밀 연락이 가능해진 것이다.
2010년 미국에서 체포된 러시아 여성 스파이 안나 채프먼은 현대 스파이들의 첨단 연락 기법을 보여줬다. 그는 러시아 해외정보부(SVR)가 제공한 노트북을 사용해 카페 등에서 무선 네트워크만 켜고 파일을 실행해 인근 차량에 있던 SVR 요원에게 암호화된 정보를 전송했다. 인터넷 없이 두 사람만의 인트라넷을 구축해 탐지를 피한 것이다.
컴퓨터와 인터넷 발달은 비밀 교신을 더 다양하게 했다. 하나의 이메일 계정을 공유하며 보관함에서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이버 드보크’, 평범한 사진·영상에 정보를 숨기는 ‘스테가노그래피’는 스파이는 물론이고 테러 조직까지 즐겨 쓰는 수단이 됐다. 요즘은 온라인 게임 채팅이나 익명 네트워크도 활용된다.
각국 정보기관은 ‘쩐의 전쟁’이라 불릴 만큼 첨단기술 개발에 막대한 돈을 쏟는다. DNA 한 가닥에 메시지를 담을 정도로 기술은 고도화됐다. 하지만 장비가 아무리 발전해도 스파이 자체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요원이 노출된 순간 첨단기술은 무용지물이 된다. 반대로 현장의 역량이 뛰어나면 같은 장비가 엄청난 시너지를 낸다. 정보기관이 스파이 개인의 훈련과 지원에 소홀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보 활동의 중심은 여전히 ‘사람’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