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정은]‘페이스메이커’ 이재명 정부의 속도 위반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9월 29일 23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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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부국장
이정은 부국장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과거 3차례의 회담을 전후해 주고받았던 27통의 친서들은 다시 봐도 손발이 오글거린다. 화려한 아첨의 수사(修辭)로 가득한 김 위원장의 편지 중에는 간혹 정색하고 속내를 드러낸 부분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노골적 통미봉남 의도를 드러낸 2018년 9월 21일자 편지다.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 문제에 대해 표출하고 있는 과도한 관심은 불필요하다”며 트럼프 대통령과 둘이서만 핵 문제를 논의하고 싶다고 쓴 대목이다. 남북 관계가 급진전되던 시기에조차 한국을 따돌리고 미국과 직거래하려는 의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트럼프 2기에서 김정은을 상대하게 된 이재명 대통령이라고 상황은 다르지 않다. ‘적대적 두 국가’를 부르짖으며 남한은 이제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김정은의 무시와 냉대는 앞으로 갈수록 더할 것이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이재명 정부의 외교안보팀은 한국 대통령의 역할을 ‘페이스메이커’로 규정했다. 대북 영향력이 큰 트럼프가 주도권을 쥐게 하되 함께 호흡을 맞추며 이를 백업하겠다는 것이다.

북-미 관계 레이스의 출발선에 선 트럼프 대통령은 아직 본격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김정은과 대화할 의향은 밝혔지만 지금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세 협상 등에 정신이 더 쏠린 상태다.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트럼프와 김정은이 깜짝 만남을 가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양쪽 모두에서 구체적인 신호는 포착되지 않고 있다.

대북정책 성과부터 내자는 조급함

막상 이재명 정부의 대북정책에서는 벌써부터 조급함이 감지된다. 보수 정부가 막고 있던 대북 유화책을 시작부터 줄줄이 풀어낼 태세다. 대북 전단 금지와 대북 확성기 중단은 접경지역에 거주하는 우리 주민들의 피해도 있으니 그렇다 치자. 여권 인사들은 9·19 남북 군사합의를 연내 복원하겠다고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DMZ 일대 우리 군의 정찰, 감시 활동과 실사격 훈련을 막아 대북 대비 태세를 약화시킨다는 우려를 낳았던 문제의 합의를 아무 조건 없이 되살리겠다고 한다. 군사 분야 권한도 없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사격 훈련과 실기동 훈련 중단 필요성을 공개 석상에서 대놓고 언급했다.

이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발표한 ‘END 이니셔티브’는 비핵화 로드맵에서 단계별 협상카드로 써 온 북한과의 교류(Exchange)와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를 비빔밥처럼 한데 섞어 버렸다. 뉴욕의 투자자들을 만나서는 대북 제재 일부를 먼저 완화할 수 있다는 뜻도 밝혔다. 물 건너간 듯 보이는 비핵화(Denuclearization)는 모르겠고, 눈에 보이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 성과부터 내고 보자는 식이다.

벌써부터 외교안보 라인 흔들어서야

자주파 원로들은 심지어 이런 움직임조차 너무 느리다고 채근하는 중이다. 이종석 국가정보원장 등과 함께 ‘자주파 6인회’ 멤버라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 대통령 주변에 동맹파가 너무 많다”며 외교안보 라인의 ‘측근 개혁’을 요구했다. 이제 갓 100일이 넘은 정부의 국가안보실 핵심 당국자들이 본 게임을 시작하기도 전에 흔들어대는 저의가 뭔가.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야말로 이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끝장낼지 모를 일이다.

마라톤에서 페이스메이커의 핵심은 속도 조절이다. 목표 기록에 맞는 일정한 흐름을 유지해 주는 것이 그의 일이다. 초반부터 너무 빨리 달리는 것은 선수의 체력 소모를 부추기고 경기 흐름을 망칠 수 있어 위험하다. 북한 비핵화 같은 장기 레이스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가뜩이나 예측 불가능한 트럼프 대통령이 어느 순간 급발진을 할지 모를 상황에서 한국이 그보다 먼저 튀어 나가 내달려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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