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경제적 가치관’ 66개국 중 4번째 진보적
이대남-이대녀도, 고령층도 차이 크지 않아
저성장에 따른 전체 파이 축소 불안 탓일까
與 잇단 ‘反기업법’은 결국 유권자들의 선택
한규섭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대한민국호’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바다로 들어섰다. 경제 성장은 멈췄고, 미중 경쟁의 고도화로 국제 정세와 통상 환경도 급변했다. 많은 기술 분야에서 중국에 추월당했고, 1인당 국민소득은 반도체 파운드리를 앞세운 대만에도 역전을 앞두고 있다. 공산당 일당 독재로 국가 주도의 일사불란한 산업·경제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중국과 달리,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책 방향을 결정할 유권자들의 ‘성향’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결국 선택은 유권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비롯한 66개국에서 실시된 제7차 월드밸류 서베이(World Value survey)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각종 가치관을 측정하는 문항들로 구성돼 있다. 제7차 조사는 2017∼2022년 진행됐다. 한국 조사는 2017년에 이뤄져 다소 오래됐지만 참여 연령대가 15세 이상부터여서 현재의 20대 초반을 제외한 전 세대가 포함됐다.
이 조사에는 △소득 평등 대 더 큰 소득 격차 △기업의 사적 소유 대 국가 소유 △정부의 책임 대 개인의 책임 △경쟁에 대한 인식 △성공과 노력의 관계 △환경 보호 대 경제 성장 등 6개의 ‘경제적 가치관’을 측정하는 문항들이 포함됐다. 응답자들의 기저에 있는 이념 성향을 추정하는 통계적 모형인 ‘등급 문항반응 모형’을 적용해, 각 응답자마다 상대적으로 진보 또는 보수적 성향인지를 추정했다. 양수(+)일수록 보수, 음수(―)일수록 진보를 뜻한다.
한국(―0.33)은 경제적 가치관에서 66개국 중 4번째로 진보적이었다. 우리보다 진보적인 경제적 가치관을 가진 국민은 이라크(―0.88), 니카라과(―0.37), 타지키스탄(―0.34) 정도였다. 이라크는 정치적·군사적 긴장이 지속돼 정상적 상황이 아니고, 니카라과는 좌파 포퓰리즘 정부, 타지키스탄은 과거 소련 시절 공산당 계열 인맥이 집권 정당의 주축이라고 한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이끄는 베네수엘라(―0.28)도 전체 6위로 우리와 비슷했다.
경제 규모 세계 12위인 한국 유권자들이 경쟁력 있는 산업이 전무한 이 국가들과 유사한 경제적 가치관을 가졌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다. 극우로 낙인찍힌 현 ‘이대남’(당시 1020 남성)과 선거 표심에서 이들과 갈리는 ‘이대녀’(당시 1020 여성)의 차이도 크지 않았다. 심지어 현 80, 90대(당시 70, 80대)도 전체에서 6번째로 진보적으로 나타났다.
반면 미국(+0.25)은 56번째로 진보적이어서 시장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했고, 반도체를 두고 우리와 첨예하게 경쟁 중인 대만(+0.10)도 44번째로 우리보다 확연히 시장주의적이었다. 가장 두려운 결과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중국(+0.17)과 베트남(+0.29)도 각각 51번째와 58번째로도 미국 못지않게 시장주의적 성향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나마 일본(―0.11)이 24번째였으나 우리보다는 시장주의적이었다. ‘잃어버린 20년’의 주인공 일본과 올해 경제성장률 0.9%를 바라보는 우리의 성향이 닮은꼴인 것은 우연일까.
한국 유권자는 왜 진보적일까. 한 가지 가설은 빈부격차다. 즉, 빈부격차가 크다 보니 분배를 중요시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소득불평등 지표인 지니계수 추정값을 보면 한국(0.329)은 미국(0.418), 중국(0.357), 대만(0.339), 베트남(0.361)보다 낮았고 일본(0.323)보다 약간 높은 수준이다. 지니계수가 높은 국가들이 더 시장주의적 성향을 보인 것이다. 오히려 우리와 일본이 상대적으로 가장 낮은 경제성장률을 보이는 국가들이란 점을 고려하면 진보적 성향은 전체 파이가 줄고 있다는 불안감에 기인한 것일지 모른다.
유독 경제적 가치관에서만 진보적 성향이 두드러졌다는 점도 흥미롭다. 한국 유권자는 66개국 중 친이민적 태도(10개 문항)에서는 35번째, 탈물질주의(3개 문항)에서는 30번째, 도덕적 태도(낙태, 혼전 성관계 등 10개 문항)에서는 28번째로 진보적이었다. 경제적 가치관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종교관(12개 문항)에서만 7번째로 진보적(종교적 신념이 약한) 성향으로 분류됐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불과 4개월이 지났지만 여당은 이미 ‘노란봉투법’, 1·2차 상법 개정안 등을 통과시켰고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골자로 한 3차 상법 개정안, 주 4.5일제 도입을 위한 법안 등을 준비 중이다. 주한유럽상공회의소가 “전면 철수까지 고려하겠다”며 우려를 표했고 한국GM 철수 가능성까지 제기됐으나 노란봉투법은 무난히 통과됐다. 대의민주주의에서 국가 정책의 방향은 유권자가 선택한 길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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