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허정]격동의 2025년, 한국 경제는 무엇을 배웠는가?

  • 동아일보

韓경제 생산-투자기반 휘청 구조적 전환점
특히 대미투자 확대 속 산업공동화 우려
고관세보다 조용하지만 장기적 위험될 것
확장재정 떠받치려면 세원 재설계가 필수

허정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허정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2025년은 한국 경제에 전례 없는 불확실성이 가해진 한 해였다. 지난해 말 비상계엄 사태에 이어 대통령 탄핵과 조기 정권교체라는 정치적 불안정에 더해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고관세 부과 선언은 한국 경제와 산업 전반을 흔들었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환율 변동성, 첨단산업 기술 경쟁까지 겹치며 기업들은 연초부터 연말까지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개별 사건처럼 보이지만, 이 변화들은 모두 한국 경제의 생산·투자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구조적 경고로 서로 연결돼 있다.

미국이 한국산 제품에 상호관세 25%라는 고율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한국 정부는 이를 낮추기 위해 범정부 차원의 대미 협상에 돌입했다. 그 결과 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향후 10년간 3500억 달러(약 510조 원) 규모의 미국 투자를 약속하는 방식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이는 정부가 피할 수 없던 ‘첫 번째 산’이었다. 관세 충격을 정면으로 받아낼 것인지, 아니면 미국 내 투자를 통해 우회할 것인지의 기로에서 정부와 국민은 후자를 선택했다. 이 과정을 통해 기업들은 당장의 고율 관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수출 제조업의 가격경쟁력 상실이라는 직접적인 시장 충격도 피할 수 있었다. 최악은 면한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산을 넘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두 번째 산’, 즉 대규모 해외 투자가 국내 산업 공동화로 이어지는 장기적·구조적 위험이 놓여 있다. 미국 투자는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지만, 그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국내 설비투자 축소, 고용 기반 약화, 지역 경제 침체가 조용히 진행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전북 군산의 경험은 산업공동화가 현실로 나타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우울한 예다. 2017년 군산조선소 가동 중단에 이어 한국GM 군산공장까지 폐쇄되자, 지역 제조업 일자리는 불과 2년 사이에 1만 명 넘게 사라졌다. 조선업 협력업체는 86곳에서 절반 이하로 줄었고, 군산국가산업단지의 고용 인원도 2013년 약 2만6000명에서 한국GM 폐쇄 발표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같은 기간 군산시 인구는 감소했고, 상권 공실률과 자영업 폐업률은 전국 최악 수준으로 치솟았다. 산업 기반이 한 번 흔들리는 순간 지역의 인구, 상권, 고용이 얼마나 빠르게 붕괴될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달리 오늘날 우리가 마주할 산업공동화는 과거보다 훨씬 조용하고 더 깊게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장기간에 걸친 산업자본의 해외 이동으로 해외 생산 비중이 커질수록 국내 협력업체의 주문은 서서히 감소하고 지역 경제의 인구, 상권, 고용도 줄어들 것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현재 해외에서 발생한 이익이 국내로 제대로 환류되지 않는 구조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매우 치명적이라는 점이다. 이 구조에서는 해외 자회사의 이익이 배당, 로열티, 재투자 형태로 현지에 묶이면서 국내 법인세 세원은 약해지고, 그만큼 국내 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와 설비투자 여력도 줄어든다. 첫 번째 산이 단기적이고 직접적인 충격이었다면, 두 번째 산은 장기적으로 더 위협적인 충격이다.

이런 상황에서 12월 국회를 통과한 2026년도 예산은 총지출 기준 727조9000억 원으로, 올해 본예산보다 8.1% 늘어난 역대 최대 규모다. 오늘날 산업, 기술, 에너지 전환을 위해 투자를 확대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문제는 앞으로 이를 뒷받침할 국내 세원 기반이 약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확장 재정이 지속되려면 안정적 세수가 필수인데, 해외 투자가 확대되는 시대의 세원 구조는 전혀 다른 재설계를 요구한다.

2026년 한국 경제가 풀어야 할 핵심 과제는 분명하다. 첫째, 해외 자회사 이익이 국내로 돌아오도록 유도하는 ‘한국형 해외 투자 수익 환류 제도’가 필요하다. 둘째, 국내 제조업 기반 유지와 기술혁신을 위한 전략적이고 강력한 인센티브를 마련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해외 투자와 국내 투자의 균형을 맞추고, 지역 제조업 생태계의 붕괴 속도를 늦출 장치를 갖춰야 한다. 셋째, 중소·중견 협력업체와 지역 경제를 보호하기 위한 공급망 전환 지원 및 리쇼어링 프로그램을 강화해야 한다.

2025년의 격동을 여러 사건의 나열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한국 경제가 구조적 전환점에 서 있다는 분명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은 대미 관세 협상을 통해 첫 번째 산을 넘었다. 그러나 두 번째 산, 즉 해외 투자 시대의 ‘조용한’ 산업공동화 리스크를 넘지 못한다면, 그 비용은 결국 미래 세대가 감당하게 될 것이다.

#한국 경제#대미 관세 협상#해외 투자#산업공동화#제조업 위기#지역 경제 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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