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대통령이 2023년 11월 29일 대통령실 청사에서 2030 엑스포 부산 유치 실패와 관련한 대국민 담화를 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은 당시 “예측이 많이 빗나간 것 같다. 이 모든 것은 전부 저의 부족”이라며 대국민 사과를 했다. 대통령실 사진기자단
“대통령이 ‘싹 잡아들여서 면허 취소하고 복구는 절대 없다고 해’라고 말했다.”
22대 총선을 앞둔 지난해 2월, 한 대통령실 참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부가 의료 개혁의 일환으로 결정한 의대 증원에 반발해 전국 대학병원 전공의들이 현장을 떠나는 등 의정 갈등이 고조되던 때였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당시 의료계를 두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혜택을 누린 기득권 카르텔”이라며 참모들에게 개혁 완수 의지를 드러냈다고 한다. 갈등 수위를 조절해 보려는 참모진의 설득은 좀처럼 먹히지 않았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초반에 너무 세게 나가면 선거 앞두고 안 좋다. 퇴로를 열어줘야 한다’며 메시지 수준을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가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다’고 또 깨졌다”고 전했다.
윤석열 정부가 중점적으로 추진했던 이른바 ‘4대 개혁’(교육, 노동, 연금, 의료)은 정부 출범부터 시작된 ‘간판 과제’는 아니었다. 윤 전 대통령이 정치 선언을 하며 내건 기치는 ‘공정과 상식’이었고, 정부 취임식 슬로건은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였지만 5년 임기의 운영 방향을 관통할 국정 철학이나 구체적인 주요 국정 과제는 없었다. 정책 실패는 예견된 결과였다. 하상응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대통령이 임기 시작할 때 국민들에게 무엇을 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지지 않았다”며 “110대 국정과제는 관료들 들으라고 한 것이고, 교육 노동 연금 등 3대 개혁 과제는 1년 뒤에나 나왔다. 완벽한 실패다”라고 평가했다.
정부 출범 초기부터 여론 수렴 없이 정책을 발표했다가 여론이 악화되면 재검토하는 사례가 반복됐다. 2022년 7월 29일 교육부가 발표한 ‘만 5세 초등학교 입학’ 방안은 충분한 사전 논의나 여론 수렴 없이 진행되다가 학부모와 교육계의 거센 비판에 부딪쳐 12일 만에 백지화됐다.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해당 방안을 발표했던 박순애 당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국민이 반대하면 정책을 폐기할 수 있다”며 수습에 나섰지만 취임 34일 만인 그해 8월 8일 사실상 경질됐다.
발표 보름 만에 전면 재검토에 들어간 ‘주 69시간제’도 마찬가지였다. 2023년 3월 정부가 주당 52시간으로 제한된 근로시간을 유연화하겠다면서 연장근로를 주 단위가 아닌 월, 분기, 반기, 연 단위로 환산한다고 발표했다가 청년층과 노동계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특정 시기 주당 근로시간이 최대 69시간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노동부는 결국 원점에서 재논의하겠다고 입장을 바꿨고 노동시장 개혁 핵심 과제로 꼽혔던 노동시간 유연화와 임금체계 개편은 주 69시간 논란 이후 중단됐다.
지난해 5월 발표했다 철회한 해외 제품 직접구매(직구) 금지 정책도 당정 협의와 여론 수렴을 거치지 않은 졸속 정책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 외에도 고령자의 운전자 자격 제한 정책 등을 발표했다 철회하며 혼란을 키웠다. 잇따른 정책 보류는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정책의 지속 가능성과 예측 가능성을 급속도로 떨어뜨렸다.
● 비전도, 소통도 없는 정책… “국민 설득 안 돼”
정책 혼선의 근본 원인에는 이해 관계자들에게 설득을 구하려는 노력과 소통 부족이 원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윤 전 대통령은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에 대해 “나눠 먹기식”, “카르텔”이라고 지적하면서 대폭 삭감했다. 이로 인해 대학에 배당되는 연구비들이 20%가량 일괄 삭감되면서 많은 대학원생과 연구원들이 연구실을 떠났고, 장기 투자가 필요한 기초과학 연구가 멈춰 서는 일도 곳곳에서 벌어졌다. 극심한 과학기술계의 반발과 청년 민심 이탈 등을 고려한 정부는 결국 1년 만에 입장을 바꿔 올해부터 관련 예산을 예년 수준으로 복구시켰다.
객관적 근거 없이 윤 전 대통령이 고집한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계획 발표는 1년 넘게 극심한 의정 갈등으로 이어지면서 의료 공백 사태를 빚기도 했다. 결국 지난달 정부가 올해 입시에서 의대 증원 규모를 0명으로 되돌리기로 하면서 의대생이 학교로 돌아왔지만 의대 교육의 질 하락 등 후유증만 남겼다.
경제 정책도 표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경기 침체와 맞물리며 역대급 세수 결손을 불렀다.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19에 대응하면서 생긴 국가 채무를 문제 삼아 ‘건전 재정’을 내세웠지만, 안정적인 세수 기반을 마련하기보다는 법인세를 인하하고 종합부동산세 2주택 이하 기본세율 적용과 같은 감세 정책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2023년 56조 원, 2024년 31조 원 등 총 87조 원의 세금이 덜 걷혔다. 모자란 세수를 채우기 위해 지난해 한국은행의 일시 대출 제도, 이른바 ‘한은 마이너스 통장’에서 170조 원이 넘는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김용철 부산대 행정학과 교수는 “윤석열 정부는 110대 국정 과제만 있었지 최고 상위에 정책 국정 슬로건도, 방향도, 모토도 없었다”며 “방향 상실로 임기응변적인 정책 추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김형준 배재대 석좌교수도 “비전이 없으니까 사람들에게 설득의 리더십을 못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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