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유혹을 못 받고 떠나간 북한 어민들[주성하의 ‘北토크’]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17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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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 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
7월 9일 동해상에서 배를 타고 돌아가는 북한 주민들. 통일부 제공
7월 9일 동해상에서 배를 타고 돌아가는 북한 주민들. 통일부 제공
바다에서 표류하다 구조된 북한 주민 6명이 9일 오전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중 4명은 5월 27일 동해 북방한계선(NLL) 이남에서 표류하다 발견됐고, 2명은 3월 7일 서해 NLL 이남에서 구조됐습니다. 각각 43일, 124일 만에 돌아간 것입니다.

정부는 동해에서 구조된 북한 주민들이 타고 왔던 선박을 수리해 NLL 인근 지역에서 북한으로 보냈는데, 이런 방식은 과거에도 종종 써왔습니다. 2019년에 동료 16명을 살해하고 도주한 북한 어민 두 명을 북한으로 강제 송환한 사건이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이후, 북한 주민의 송환은 매우 민감한 문제가 됐습니다.

하지만 돌아가겠다고 강력히 희망하는 사람을 강제로 한국에 살게 할 순 없습니다. 최근 북한이 주민들의 어업 활동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바람에 남쪽까지 표류하는 사례가 거의 없을 뿐이지, 과거엔 북한으로 송환한 사례들이 너무 많아 이슈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2010년부터 2022년까지 12년 동안 북한 주민들이 해상 등을 통해 남측으로 직접 넘어온 경우는 총 67회, 인원수로는 276명이었고, 이 중 194명이 47회에 걸쳐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2022년 이후에 구조돼 북으로 간 사람은 올해 6명이 더 추가됐을 뿐입니다.

이명박 정부 동안(2010~2012년) 해상월선 104명 중 57명을, 박근혜 정부 동안(2013년~2017년 4월) 해상 월선 98명 중 82명을, 문재인 정부 동안(2017년 5월~2022년 5월) 해상 월선 74명 중 55명을 송환했습니다. 발견 후 송환까지 소요된 기간은 2010년부터 현재까지 송환 47회 평균 5.6일이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배가 부서졌을 경우는 판문점을 통해, 배에 문제가 없다면 배에 태워 북송이 이뤄졌습니다. 3월 7일에 구조된 2명이 머물렀던 124일의 체류 기간은 유례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초기 두 달 가까이 “남조선의 물로는 씻지 않겠다”며 샤워도 하지 않고 있다가 냄새가 코를 찌르자 주변을 경계하며 샤워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또 “썩어빠진 자본주의 선전물을 보지 않겠다”며 숙소에 있는 TV도 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건강한 몸으로 조국에 돌아가기 위해서”란 자기 합리화를 내걸고 제공되는 식사와 간식은 잘 챙겨 먹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송환을 강력하게 희망한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의 안전에 대한 염려였을 겁니다. 자의든 타의든 한국에 귀순하면 북한에 남겨둔 가족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니까요. 또 하나의 이유는 북한으로 돌아가면 받을 ‘포상’을 기대했을 겁니다.

김정은은 4개월 동안 지조를 지키며 돌아온 이들을 잘 대해줄까요. 한국에 표류했다가 구조된 북한 주민들은 처음 신문을 받을 때 공통된 생각을 떠올릴 겁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 북한이 만들어둔 ‘교본’이 있기 때문입니다.

2006년 12월 강원도 속초 해상에서 표류하다 구조된 북한 군인이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는 모습. 마중나온 북한군 장성들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다. 동아일보 DB
2006년 12월 강원도 속초 해상에서 표류하다 구조된 북한 군인이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는 모습. 마중나온 북한군 장성들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다. 동아일보 DB


● 교본의 탄생
“왜 여자를 들여보내지 않지? 언제 들여보내려고 뜸을 들이는 걸까.”

인천에서 4개월을 지낸 북한 주민들은 이 생각만 하면서 보냈을 겁니다. 아마 돌아가면서도 “왜 우리에겐 여자를 들여보내지 않았을까”를 심각하게 고민해 볼 겁니다.

네, 그렇습니다. 북한이 만든 교본엔 “한국 괴뢰들에게 체포되면, 요상하게 치장한 여자를 들여보내 귀순을 유도한다. 이때엔 단호하게 여자를 밀어버려야 한다”고돼 있습니다.

그럼 이런 교본은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1994년 2월 북한 노동신문에는 남조선으로 표류했지만 당당히 싸워 돌아온 두 병사에 대한 이야기가 전면으로 실렸습니다. 노동신문에 김씨 일가가 아닌 일반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그 정도 분량으로 실리는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북한이 남쪽에 표류했다가 구조된 뒤 돌아온 사람을 선전전의 소재로 쓴 첫 사례였습니다.

1994년 1월 27일 한국 해군함정은 서해 백령도 근해에서 표류하던 북한군 병사 두 명을 발견했습니다. 이들은 황해남도 용연군 오차신리(일명 장산곶) 초소에서 근무 중이던 조선인민경비대 소속 하사 김철진(23)과 전사 김경철(19)로, 목선을 타고 나왔다가 높은 파도에 휩쓸려 표류했습니다. 구조된 직후 두 군인은 서울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고, 본인들의 의사에 따라 2월 1일 판문점을 통해 송환됐습니다. 이들은 4박 5일간 한국에 머물렀습니다.
북한군 김철진 하사가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북한군 김철진 하사가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노동신문은 두 병사가 한국 괴뢰들의 집요한 귀순 회유를 뿌리치고, 장군님의 품으로 돌아가겠다며 절개를 지켰다고 칭찬했습니다. 거의 한 편의 신파극을 보는 듯한 스토리였습니다. 김철진은 북한의 최고 훈장인 공화국영웅 메달과 함께 소위로 진급했고, 김경철은 ‘김일성청년영예상’을 수여받았습니다.

이듬해엔 이들을 소재로 한 영화 ‘두 병사’가 나왔고, 2000년엔 영화와 내용이 별반 다르지 않은 중편소설 ‘대결’이 나왔습니다. 영화 시나리오는 당시 김정일의 신임을 받던 오극렬 노동당 작전부장의 맏딸 오혜영이 썼습니다.

노동신문과 영화, 소설이 바로 북한 주민들에게 남쪽에 표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교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두 병사란 영화나 대결이란 소설을 보면 배를 잡고 웃을 것 같습니다.

영화에는 이들의 귀순을 지휘할 노련한 북한 전문가인 안기부 고형근 과장이 나옵니다. 귀순 공작은 일곱 단계로 진행됩니다.

첫째는 좋게 말로 설득합니다. 당연히 거절당하겠죠.

두 번째는 반라의 차림에 진한 화장을 한 여성이 이들이 있는 방에 들어가 몸을 비벼대며 온갖 유혹을 던지지만, 병사들은 사탄을 몰아내듯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세 번째는 돈 공세입니다. 고 과장은 집과 차 등 50만 달러 상당의 포상을 하겠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도 실패겠죠.

네 번째는 이북 사투리를 쓰는 가짜 ‘월남자’를 내세웁니다. 이때엔 탈북자란 말이 없으니 월남자로 묘사했겠지요. 이들은 쌍욕을 먹고 쫓겨납니다.

다섯 번째는 심리전입니다. 상급자 병사와 닮은 대역을 내세워 그가 고문을 받다 전향에 동의한다는 영상을 만들어 하급자 병사에게 보여줍니다. “자, 상관도 돌아섰고, 이미 신문에도 너희들이 전향했다고 보도됐으니 너도 돌아서라”는 것이지만 하급자는 거부합니다.

여섯 번째 단계는 여자와 함께 노래방에 데려가 애수, 비애, 고독감을 조장하는 슬픈 노래를 부르게 하는데, 북한 병사는 김정일 찬가를 부르며 이겨냅니다.

일곱 번째 단계는 “너희는 전향자로 알려진 채 이름도 없이 죽을 것이다”며 사형장에 내세웁니다. 두 병사는 입고 왔던 북한 군복과 김일성 배지를 강력하게 요구하며, 군복 차림으로 사형장에 나갑니다. 이때 미군 사령부가 북한을 건드리면 큰일이 난다고 펄쩍 뛰면서 당장 보내라고 해서 두 병사는 돌아갑니다.

두 병사의 모습은 마치 광야에서 악마의 온갖 유혹을 받던 예수처럼 묘사됩니다. 돌단 위의 예수는 단호한 음성과 몸짓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외칩니다. 하느님 자리에 ‘장군님’을 넣으면 두 병사가 예수님 같아 보일 지경입니다. 어떤 유혹에도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시종일관 장군님입니다.

소설도 영화와 줄거리는 같지만, 귀순 공작 책임자가 월남한 악질 반동의 자손이라고 나오며, 귀순 공작에 실패하니 권총으로 자살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너무나 상투적인 북한식 전개죠.

● 교본의 종말

영화가 나오고 이듬해 이 교본으로 무장한 병사가 등장합니다. 1996년 11월 23일 연평도에서 북한군 상등병 정광선(19)이 표류 중에 발견됐습니다. 정 씨는 구조를 위해 다가간 한국 경비정에 처음엔 도끼를 휘두르며 몇 시간이나 저항하다가 파도가 높아 목선이 뒤집어질 것 같으니 먼저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구조된 그의 첫 마디는 “배고프다. 먹을 것을 달라”였습니다.

그는 땅에 도착한 뒤엔 옷과 음식을 거부하고, TV도 보지 않은 채 “장군님 품에 보내달라”고 생떼를 부렸습니다. 3박4일 뒤 그는 판문점으로 귀환했습니다. 북한 땅에 발을 딛자 그는 두 손을 번쩍 쳐들어 김정일 만세를 외쳤습니다.

북한군 정광선이 1996년 11월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돌아가는 모습. MBC 캡처
북한군 정광선이 1996년 11월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돌아가는 모습. MBC 캡처
북한 매체들은 정광선이 “낮에는 간교한 남조선 도당의 교활한 귀순 시도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하고 밤에는 가슴에 지도자 동지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달래며 지도자 동지를 결사 옹위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또 다졌다”는 선전을 했습니다.

푸짐한 포상도 있었습니다. 19세 병사는 장교로 승진했고,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함북 청진의 그의 모교는 ‘정광선고등중학교’로 개명됐습니다.

이후부터 구조된 사람 중 북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밥을 줘도 거절하고, 치료도 거부하고, 구멍이 뚫린 낡은 옷을 입고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하는 사례가 늘었습니다.

2009년 구조된 북한 주민들이 판문점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들은 발견 당시 입었던 엉덩이가 꿰진 바지와 소금에 쩌든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가겠다고 고집했다. 동아일보 DB
2009년 구조된 북한 주민들이 판문점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들은 발견 당시 입었던 엉덩이가 꿰진 바지와 소금에 쩌든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가겠다고 고집했다. 동아일보 DB
아마 북에 돌아가 조사할 때 “우리는 적후에서도 매 순간 장군님만 그리며, 적의 회유를 단호하게 뿌리쳤고, 적의 쌀 한 알도 먹지 않고 왔다”고 주장했을 겁니다.

하지만 포상은 처음에만 있지, 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김철진, 김경철, 정광선 이후 북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포상을 받았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습니다. 사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포상은 없을지라도 “적이 주는 밥도 먹고, 치료도 받았습니다”고 하면 사상이 잘못됐다고 처벌은 확실히 받을 것이니 말입니다.

이런 맥락을 안다면, 인천에서 4개월 동안 머물렀던 북한 주민들이 두 달 넘게 샤워도 하지 않고, TV도 보지 않았다는 것이 이해될 겁니다. 이런 소식이 한국 매체들을 통해 전해졌으니 아마 이들은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김정은이 마음먹기에 따라 “김정은 시대의 진정한 충신”의 귀감으로 선정돼 1990년대의 운 좋은 북한군 병사들처럼 푸짐한 포상을 받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들 주민들은 돌아가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겠죠. “왜 남조선 괴뢰들은 우리에게 여자를 들여보내지도 않고, 돈도 준다고 하지 않았으며, 사형을 내리지도 않았을까. 우리가 그 정도로 이용 가치가 없었던 것일까.”

그런 일은 북한이 만든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꽉 닫힌사회에서 일방적인 세뇌만 받으며 살았던 사람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그리고 이들이 모르는 일은 또 있습니다. 북한 당국이 진정한 충신의 사례로 내세운 정광선은 3년 뒤 사고를 쳤습니다.

술자리에서 그만 “남조선을 암흑의 세상이라고 배웠는데, 서울에 가보니 완전히 불바다더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 말이 김정일에게까지 전달됐는데, 김정일은 “앞으로 남조선을 암흑의 세상이라 교육하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후 북한 대남 교육은 “한강 다리 아래 거지가 득실댄다”는 레퍼토리에서 “부익부 빈익빈이 극심해 살기 힘든 사회”로 바뀌었습니다. 정 씨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 북한 매체에선 사라졌습니다.

1996년 11월 유엔사 장교의 안내를 받아 판문점으로 향하던 정광선의 모습. MBC 캡처
1996년 11월 유엔사 장교의 안내를 받아 판문점으로 향하던 정광선의 모습. MBC 캡처
그리고 교본의 탄생을 만든 김철진 역시 장교로 승진해 잘 나가다가 한순간에 말실수로 인생이 끝났습니다.

2014년 8월 14일 세계일보는 대북소식통을 인용해 “김철진 군 선전부장(대좌, 대령급)이 남한 체제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습니다. 1971년생인 김철진은 2014년이면 43세입니다. 그런데 전 국민의 귀감 사례로 영웅 칭호까지 받았으니 출세도 빨라, 선전 담당 대령급이 된 것 같습니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김철진은 그해 5월 울릉도 해상에서 표류하다 우리 해경에 의해 구조된 뒤 북한으로 돌아온 북한 어민을 소재로 체제 선전 교육을 하다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당시 청진을 출발한 북한 어민 3명이 발견됐는데, 2명은 떠날 때부터 탈북이 목적이라 한국에 남았지만, 영문 모르고 기관을 조종했던 1명은 다시 가겠다고 해서 돌려보냈습니다. 이에 북한 당국은 군인들을 대상으로 “2명은 남측에 납치돼 구타·고문을 심하게 받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교육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교육에 당연히 김철진이 강사로 나섰겠죠.

김 씨는 강연 말미에 “정말로 남조선에 가면 구타와 고문을 당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왔을 때 “교육 내용은 과장됐고 실제로는 잘 대해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만들어준 신화를 자기 입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김철진은 즉시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정광선과 김철진의 사례를 보면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다는 진리가 떠오릅니다. 그들에겐 먹고, 입고 살았던 모든 것, 창밖으로 스쳐 지나갔을 풍경들이 엄청난 충격이었을 겁니다. 자신들의 경험이 완전히 왜곡되어 영화나 소설로 나오고, 이를 사실인 듯 전 국민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모습을 보고 그제야 자신들이 사는 땅이 어떤 곳인지 알게 돼 괴로웠을 겁니다. 그리고 이중적인 삶의 끝은 비극이었습니다.

이번에 돌아간 주민들은 부디 통일되는 순간까지 입을 잘 꿰매고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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