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보다 사랑하는 원산, 김정은은 왜 원산에 집착하나[주성하의 ‘北토크’]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26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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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


12일 방북 중인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요트에서 회담하고 있는 김정은. 요트 창밖으로 원산 시내와 새로 지은 갈마해안관광지구가 병풍처럼 펼쳐졌다. 노동신문 뉴스1
북한 김정은에게 새로운 외빈 접대 코스가 생겼습니다. 일명 ‘요트 접대’입니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별장인 원산 별장에서 편히 쉬다가 아침에 나와 요트에 오릅니다. 건너편 원산 갈마반도 선착장까진 직선거리로 5.5㎞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손님을 태운 뒤 갈마반도를 돌아 새로 건설된 갈마해안관광지구 앞바다에 요트를 세웁니다. 아직 내부가 완성되지 않은 건물들이 즐비한, 그럼에도 외부는 그럴싸하게 완성된 해안관광지구는 요트의 멋진 병풍이 되어줍니다.

저녁에 다시 해안관광지구에 돌아와 고급 호텔에서 연회를 엽니다. 연회를 마치고 다시 요트에 올라 별장으로 돌아가면 일과가 끝납니다. 붐비는 원산 도로에서 가난한 백성들과 마주칠 일은 전혀 없습니다.

이달 12일 방북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이 요트 접대의 첫 귀빈이 됐습니다. 그가 탄 요트는 김정은이 보유한 4척의 요트 중 하나입니다. 김정은에겐 길이가 80m 짜리인 요트도 있고, 450만 파운드(약 84억 원)에 이르는 ‘프린세스 95MY’ 요트도 있지만, 라브로프 장관이 탄 요트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회담을 할 수 있는 원탁이 설치된 요트가 이것뿐이 아닐까 싶습니다.

80m 요트는 이중나선형 워터슬라이드와 올림픽 규격 수영장이 있는 떠다니는 수영장이고, 프린세스 95MY 요트는 길이가 길지 않아 회담에 적합하진 않습니다.

러시아 대표단 환영 연회는 관광단지에서 제일 좋은 숙소인 ‘명사십리호텔’에서 열렸고, 북한 최선희 외무상과 라브로프 장관의 북-러 회담은 관광단지 내 ‘갈매기호텔’에서 진행됐습니다.

수억 달러를 들여 만든 멋진 해안가 병풍, 병풍 뒤에 있는 국제 비행장, 귀빈들에게 창피하지 않을 신규 고급 호텔이 생겼으니, 김정은이 앞으로 원산에 머물 일이 많아질 것 같습니다.

이렇게 김정은이 원산에 머무르면, 원산 사람들, 특히 현지 간부들의 한숨도 높아질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자꾸 눈에 보이게 되면 김정은의 잔소리가 늘어날 것인데, 자칫 기분이라도 나쁘게 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김정은이 원산을 사랑하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구글어스로 본 원산 전경. 빨간 점이  김정은의 특각 선착장이고, 파란 점이 갈마반도 요트 선착장이다. 구글어스 캡처.
구글어스로 본 원산 전경. 빨간 점이 김정은의 특각 선착장이고, 파란 점이 갈마반도 요트 선착장이다. 구글어스 캡처.


1. 김정은의 고향

북한은 김정은의 고향이 어디인지 아직까지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산에서 태어났거나, 원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북한 간부들이 고용희를 ‘원산댁’이라고 불렀다는 증언들이 있습니다.

김정일은 고용희 이전에 성혜림, 김영숙이라는 여성들과 살았습니다. 이슬람 국가도 아닌데 한 집에서 살 순 없으니 서로 멀리 떨어져 살게 했죠.

김정일이 만수대예술단 무용수였던 고용희를 불러 몰래 밀회를 즐긴 장소는 평양 서성구역에 있는 서평양역 인근 별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용희가 김정철을 임신하게 된 뒤엔 환경이 더 좋은 원산에 가 있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정은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엔 원산이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을 겁니다. 원산 특각에 가면 나무 한 그루, 돌 하나에도 일찍 사망한 어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지 않을까요.

하지만 여름엔 바다에서 신나게 뛰어놀았겠지만, 겨울엔 놀만한 거리가 별로 없었겠죠.

“왜 원산엔 겨울에 갈만한 스키장이 없지?”라는 불만은 나중에 마식령스키장으로 해결한 것 같습니다. 집권하자마자 할 일들이 태산인데, 숱한 군인들을 투입해 마식령에 스키장부터 짓게 한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합니다.

북한 사람들이 스키를 타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식령 스키장이 건설되기 이전에 스키를 실물로 봤을 북한 주민은 100명에 한두 명 정도에 불과했을 겁니다. 장비와 환경 구축에 많은 돈과 시간이 투입되는 스키는 ‘혁명국가’ 북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치스러운 운동입니다. 스키를 탈 시간이 있으면 학습해야 하고, 하다못해 동네에서 개똥을 주워 봄에 쓸 퇴비를 마련해야 하죠.

② 완벽한 휴양지


바닷가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늘 바다를 꿈꿉니다. 그런데 평양엔 바다가 없습니다. 김정은의 평양 저택이 아무리 호화롭게 지어졌다고 해도, 시내 가운데 있다 보니 협소합니다. 그곳엔 요트를 정박시킬 수가 없는 것이니까요.

반면 602초대소로도 불리는 원산 특각에는 휴양지로 갖추어야 할 모든 것들이 다 있습니다. 바다도 있고, 산도 있고, 섬도 있고, 승마장이나 스키장도 있습니다. 특각 부지가 워낙 넓어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동할 때는 전동 카트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름엔 바다에 띄운 수영장 요트에서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즐길 수 있죠.
통천 앞바다에 있는 김정은의 전용섬들. 낚시터, 승마장 등이 있는 이곳엔 누구도 접근할 수 없고, 오직 김 씨 패밀리만 갈 수 있다. 구글어스 캡처
통천 앞바다에 있는 김정은의 전용섬들. 낚시터, 승마장 등이 있는 이곳엔 누구도 접근할 수 없고, 오직 김 씨 패밀리만 갈 수 있다. 구글어스 캡처
요트를 타고 가까이 통천 앞바다에 가면 낚시터가 갖춰진 호화 별장이 또 있습니다. 이곳에 ‘사도’, ‘동덕도’, ‘전도’라는 이름이 붙은 아름다운 섬이 세 개가 있습니다. 섬에서 멀리 아름다운 금강산을 바라볼 수 있죠.

이 섬들엔 접안시설과 별장들이 갖춰져 있는데, 2013년 김정은의 초청으로 방북한 미국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먼이 이 섬을 가본 유일한 외부인입니다.

로드먼은 영국 일간지인 ‘더 선(The Sun)’과의 인터뷰에서 “이 섬의 호화 별장은 7성급 최고급 호텔이며, 하와이나 스페인 휴양지 이상으로 환상적이었고, 미국의 최고 갑부들도 이런 호사는 누려보지 못했을 것”이라며 극찬했습니다.

배를 타고 북쪽으로 좀 올라가면 ‘수중 특각’으로 알려진 72호 별장도 있습니다. 함남 낙원군에 있는 이 별장은 김정일이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했다지만 여긴 100년이 걸려도 따라오지 못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 규모나 시설 면에서 최고급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바닷물을 활용한 인공 폭포와 수영장, 동물원과 롤러스케이트장이 내부에 있다고 합니다. 원산에만 가면 모든 것이 다 준비돼 있는데, 김정은이 굳이 평양에 머무를 이유가 있을까요.
김정은의 원산 특각 위성사진. 수많은 호화주택이 있고, 앞바다엔 80m 길이의 수영요트가 있다.  구글어스 캡처.
김정은의 원산 특각 위성사진. 수많은 호화주택이 있고, 앞바다엔 80m 길이의 수영요트가 있다. 구글어스 캡처.


③ 패밀리 콤플렉스(가족 단지)

원산 특각이 사랑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김 씨 패밀리들을 위한 교류의 마당이 된다는 것입니다. 구글어스로 특각을 보면, 메인 건물을 중심으로 10여 채의 호화주택이 주변에 있습니다. 그리고 높은 아파트까지 있습니다. 이곳에선 누군가가 살고 있을 겁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1990년대 중반 원산 특각을 지키는 974부대에서 근무한 강진 씨는 자신이 근무할 때 늘 5세부터 17세로 보이는 아이 30명 정도가 특각에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아이들은 여름에는 물오토바이(수상스키)를 타고 놀았고, 토요타 또는 스즈끼 로고가 붙은 전기차를 타고 경주도 했다고 합니다. 아마 그가 본 아이 중에 김정철이나 김정은, 김여정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경비원들은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나무 한 그루 정도에 불과합니다. 참고로 강 씨는 김정일을 수십m 앞에서 볼 기회가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젊은 여성이 김정일의 팔을 잡고 다녔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있으면 어른들도 있었겠죠. 김정은에게도 친인척이 많습니다. 친가 쪽으론 고모인 김경희가 있고, 김정일의 사촌 형제들도 있습니다. 외가인 고용희 쪽 친척들도 당연히 있습니다. 고용희에겐 오빠도 있었고, 자매들도 여럿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김정은에겐 이모가 되고, 그들의 자식들과는 외사촌이 됩니다.

이설주의 친인척도 당연히 있습니다. 김정일은 여배우 성혜랑이 김정남을 낳았을 때, 성 씨의 모친인 김원주, 언니인 성혜랑, 성혜랑의 아들인 이한영, 딸 이남옥을 모두 자기 집에서 살면서 김정남을 돌보게 했습니다. 김주애 역시 외할아버지도, 외삼촌이나 이모가 있을 겁니다. 친척들과 교류하며 지내는 것은 김주애의 성장에서 중요합니다.
평양 중구역에 있는 김정은 관저. 15호 관저로 불리는 이곳은 중앙당 청사와 인접해 있다.
평양 중구역에 있는 김정은 관저. 15호 관저로 불리는 이곳은 중앙당 청사와 인접해 있다.
하지만 평양의 김정은 관저에선 친인척이 가끔 식사 정도는 할 수 있어도 모여서 놀기엔 협소합니다. 원산 특각에선 김정철이나 김여정도 좋은 특각 하나씩 차지하고 그들의 자녀인 김주애의 사촌 형제들이 함께 뛰어놀 수 있겠죠.

김정은 남매에겐 큰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김경희도 이곳의 어느 건물에서 머무를지도 모릅니다. 마치 드라마에서 단골로 나오는 재벌집 식사 자리처럼, 고모가 부르면 김정은 3남매가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겠죠.

패밀리만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늘 따로 있는 겁니다. 가령 형제끼리 앉아서 “거, 아무개 비서가 눈빛이 불량한데 치워버려”, “최신형 벤츠 구입해 오라는데, 아무 개가 말을 듣지 않네”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죠.

④ 철통 보안

원산 특각은 경호 역시 뛰어납니다. 해상을 통해 이곳으로 접근하려면 갈마반도를 끼고 돌아야 하는데, 비밀리에 접근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곳은 김정은의 친위대로 알려진 974부대 부대원 수천 명이 철통 경비를 펼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된 974부대 출신 강 씨가 근무하던 1990년대 중반에 이곳을 경호하는 부대원은 8개 중대에 2500명이나 됐습니다. 이들은 매일 5교대로 2시간씩 보초를 섰는데, 김정일이 있을 땐 25m 간격으로, 없을 땐 50m 간격으로 근무를 섰습니다.

974부대는 근무지에 접근하는 사람은 무조건 사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입대한 순간부터 대원들에게 “죽은 자만이 비밀을 지킨다”고 한 김정일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이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974부대원은 모르고 구역을 침범하는 사람을 사살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쏴 죽이면 어떤 처벌도 없는 대신, 전사영예훈장 1급을 주고, ‘화선입당’을 시키며, 군관학교까지 보내주기 때문입니다.

974부대는 바닷가 옆 별장에서 근무하지만, 바다에서 수영할 기회는 없습니다. 강 씨 역시 원산에서 몇 년을 근무하면서도 바다에 한 번도 들어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바다에 들어갈 특권은 김 씨 일가에게만 있으니까요.

구글어스로 보면 특각 앞 바다에 바지선처럼 보이는 구조물 8개가 막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상 경계는 대남 공작원으로 양성된 1022연락소 전투원들이 맡고 있습니다.

원산항은 많은 배들이 오가는 곳입니다. 하지만 특각 4km 이내 거리엔 배가 접근할 수도 없고 사진을 찍을 수도 없습니다. 한 탈북민의 증언에 따르면 어느 군부대 소속 어선 선장이 바다에서 특각 방향으로 사진을 찍었다가 갑자기 나타난 쾌속정에 연행됐다고 합니다.

찍은 목적을 대라며 사흘 동안 초주검이 될 정도로 매를 맞았는데, 다행히 군 소속인 데다 ‘빽’이 좋아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민간인 같으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을 거라고 수군거렸다고 합니다.

10여년 전까진 육지에서 특각이 맨눈으로 보이는 곳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송도원야영소 숙소 제1동과 식당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건너다볼 수 있을 만한 창문은 판자로 죄다 막아놓았다고 합니다. 판자 틈으로 보려 하면 어느새 호각을 빽빽 불어대며 경비병이 나타나는데, 맞은편에 쌍안경으로 쉬지 않고 감시하는 감시병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김정은 시대엔 야영소 재건축 공사가 진행됐다니, 이젠 창문도 다 없애버렸겠죠.

김정일 시대에 수천 명이 경호했으면, 그때보다 중요도가 더 높아진 지금은 훨씬 더 많은 군인이 지키고 있을 겁니다. 평양 자택보다 경비 병력이 훨씬 많을 겁니다.

이렇게 김정은이 원산을 사랑하는 이유를 분석해 봤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선 태양과 멀어지면 얼어 죽고, 너무 가까우면 타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김정은이 평양처럼 사랑하는 도시가 되다보니 원산 사람들은 늘 도시를 깨끗이 유지해야 합니다. 평양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데도 새벽에 늘 나와서 도로를 청소하는 평양 사람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 김정은의 질책을 받으면 숱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됩니다.
화려한 불빛으로 장식된 원산의 야경. 사진 출처 우리민족끼리
화려한 불빛으로 장식된 원산의 야경. 사진 출처 우리민족끼리
좋은 점이 있다면 늘 암흑 속에서 살아야 하는 다른 도시와 달리 원산엔 전기는 잘 온다는 것입니다. 캄캄한 어둠이 싫어서인지, 김정은은 집권하자마자 도시 건물과 외향을 현대적으로 하라고 들볶았는데, 덕분에 원산의 야경은 몰라보게 달라졌습니다.

빌딩마다 빨갛고 파란 조명 장치를 잘해놓아서 전기 공급이 잘되는 명절 때 바다에서 보면 남쪽 동해안 어느 항구보다 야경이 멋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오랜만에 원산항에 들어오던 북한 어선이 “남조선에 잘못 왔다”고 정신없이 도망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에 김정은의 초청을 받아 북에 가는 외빈은 원산의 야경을 보고 감탄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젠 갈마해안에 멋진 외형의 관광단지도 만들었으니, 다음에 김정은이 원산에서 손 볼 곳이 어디일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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