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월 20일 미국 뉴욕 유엔 고위급 회의장. 김성 주유엔 북한 대사가 격앙된 소리로 말했다.
“북한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주권을 침탈하기 위해 소집된 이 회의를 강력히 규탄한다. 더 유감인 건 부모와 가족조차 내버린 쓰레기(scum) 같은 인간들을 증인으로 초청한 것이다.”
김 대사의 발언은 앞서 탈북민 김은주 씨가 제79차 유엔 총회 주최 북한 인권 고위급 전체회의에서 북한 정권의 인권 침해를 증언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자기 할 말만 마치고 황급히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과 시종일관 굳은 얼굴로 서 있는 북한 참사의 모습을 보면서 은주 씨는 생각했다.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네. 미국에 와 있으면 북한의 실상을 너무 잘 알텐 데 저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인간들….’
다음날 은주 씨는 모 언론사 기자와 함께 뉴욕에 있는 북한 유엔 대표부를 찾아갔다. 북한 대표부는 보안도 제대로 되지 않는 싸구려 아파트 13층에 있었다. 허술한 문짝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엔 대표부’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은주 씨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두드렸다. 한 남자가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탈북자입니다.”
말이 끊기기도 전에 남자는 문을 쾅 닫았다.
은주 씨는 닫힌 문을 향해 준비해 간 편지를 읽었다.
“저는 여러분들도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실을 알면서 앞으로도 북한 정부를 계속 대표한다면, 여러분은 가해자가 될 것입니다.”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다 읽은 편지를 문 앞에 두고 내려왔다.
그때를 회상하며 은주 씨는 말했다.
“유엔 총회에선 시간과 상황의 제약 때문에 북한 대표부와 직접 이야기하지 못해 아쉬웠어요. 기회가 된다면 북한을 대표한다는 저들에게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하고 싶었어요. 나와 내 가족을 버린 것은 북한 당국입니다. 저는 부모와 가족조차 내버린 쓰레기가 아니라, 식량난에 북한 정권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아버지를 잃고 나머지 가족과 함께 목숨을 걸고 탈북해 새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요.”
김은주 씨가 올해 5월 유엔에서 북한 외교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북한 인권 실상을 증언하고 있다.
‘고난의 행군’을 만난 어린 운명
은주 씨의 고향은 아오지탄광이 있는 함경북도 은덕군이다. 오랫동안 경흥이라 불리다 김일성 은덕을 많이 받았다는 의미로 1977년 은덕군으로 개명했다.
1986년 8월 15일 ‘120(일이공)군수공장’ 노동자인 부친과 ‘613(육일삼)탄광’ 병원 직원 모친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언니는 두 살 위였다.
북한엔 이름에 숫자가 붙은 공장이나 기업소가 많다. 대개 김 씨 일가가 만들 것을 지시한 날짜 또는 현지 시찰한 날짜의 달과 날을 의미한다.
그의 아버지는 군 복무를 마친 뒤 ‘무리 제대’ 대상이 돼 은덕에 오게 됐다. 제대 군인들을 인력이 모자라는 지역에 수백 명씩 보내는 것을 무리 제대라고 한다. 어머니는 평양에서 만경대 인근 칠골중학교까지 졸업했지만, 평양 인구 축소 정책 때 부친(은주 씨의 외조부)이 쫓겨난 함북 청진으로 오게 됐다.
은덕을 받았다는 이름과 달리 은덕군은 북한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어서 은주 씨는 어려서부터 배고픔에 시달렸다. 다행히 모친이 병원 식당에서 일했기 때문에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 초기에 굶어 죽는 운명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병원도 식량을 받지 못하고 마비되기 시작했다. 1996년 인민학교 3학년이던 은주 씨는 대열을 맞춰 노래 부르며 하교하다가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며 주저앉았다. 겨우 열 살이었지만 그는 삶이 여기서 끊길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꼈다.
‘먹지 못해 빈혈을 느끼고 있다. 집은 가난하고 식량 사정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나는 먼저 죽은 친구들을 따라갈 수도 있다.’
그때부터 1999년 2월 18일 첫 번째 탈북을 할 때까지 3년간 기억은 전부 깜깜했다. 그는 생지옥을 목격했다.
산에 묘비 없는 무덤들이 즐비했다. 각목으로 세운 묘비는 며칠 뒤 사라졌다. 땔감으로 뽑아 간 것이다. 노인과 남자, 아이, 여성 순으로 죽어 갔다. 청진에 살던 외할아버지도 1997년에 굶어서 숨졌다. 공개 총살도 늘어났다. 처음으로 목격한 공개 처형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선생님 인솔 하에 7~11세밖에 안 되는 학생들이 단체로 처형장에 갔다. 총살된 사람은 옥수수 30kg를 훔치다가 사람을 죽인 남성이었다.
해가 갈수록 사정은 나빠졌다. 장마당에서 구걸하다 쓰러진 앙상한 시체들이 늘어났다. 파라티푸스, 장티푸스 같은 수인성 전염병이 창궐했다. 뼈밖에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 남은 몸속 수액을 내쏟으며 죽어 갔다. 그가 살던 아파트에서도 하루가 멀게 산 사람이 시신으로 변했다. 집을 팔아도 두부 한 모와 바꿀 수 없었다. 살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소나무 껍질만 먹다 풀독이 올라 죽은 이웃도, 독버섯인 줄 알면서도 먹고 죽은 이웃도 있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을 바엔 차라리 먹고 죽자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람 힘이 빠지니 아파트도 힘이 빠진 걸까. ‘속도전’ 날림식으로 지은 아파트 벽에 커다란 금이 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 됐지만 이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김은주 씨가 2023년 한국을 방문한 미국 대학생들 앞에서 북한의 실상을 설명하며 미소 짓고 있다.
열한 살의 유서
1997년 11월 아버지가 굶어 죽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뒤 늑막염 진단을 받은 뒤부터 아버지가 이상해졌다. 너무나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남들처럼 농장 밭에서 뭐든 훔쳐 오라고 해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늑막염 진단을 받게 됐다. 아무리 먹어도 성에 차지 않아 했고, 딸들 몫으로 남긴 죽까지 먹었다.
집에서 판자까지 뜯어 내 먹을 것과 바꾸기 시작했다. 딸 책가방을 들고 나가 먹을 것과 바꾼 며칠 후 아버지 눈빛이 바뀌었다. 죽음을 직감한 어머니가 겨우 죽을 만들어 떠먹였지만, 그 좋아하던 죽을 두세 숟가락밖에 삼키지 못했다. 다음날 누운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직장 동료들이 찾아와 판자로 관을 만들어 아버지를 묻었다. 그나마 공장에서 만들어 준 관에 묻힌 마지막 사람이었다. 며칠 뒤부턴 판자가 없어 그냥 가마니에 시신을 싸서 묻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 은주씨네 온 가족은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다. 은주 씨와 언니는 1997년 한 해 학교에 다니지 않고 온종일 먹을거리를 찾아 헤맸다. 토끼 배설물에 붙은 나물 쪼가리까지 골라 먹었다.
어머니가 언니를 데리고 나선시로 수백 리 길을 떠났다. 중국인들이 장사하려 드나든다는 나선에 먹을 것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떠나기 전 어머니는 그에게 북한 돈 15원을 주면서 “빠르면 하루, 늦으면 사흘 안에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 돈으론 두부 한 모를 살 수 있었다.
그 이튿날 은주 씨는 장마당에서 두부 한 모를 사 먹었다. 그 뒤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어머니가 돌아올까 11세 은주는 매일 동네 어귀로 나갔다. 나흘이 지나도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떠난 뒤 엿새째 저녁 은주 씨는 집의 싸늘한 시멘트 바닥이 자신을 빨아들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일은 마중 나갈 수가 없구나. 내일 내가 죽는 날이구나.’ 어머니도 없이 혼자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몹시 서러웠다. 겨우 종이 쪼가리를 찾아 한 자 한 자 적었다. ‘엄마, 곧 죽을 것 같아요. 기다리지 못해 미안해. 용서해.’ 종이를 머리맡에 놓고 죽음을 기다렸다. 의식이 점점 흐릿해졌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인기척이 들렸다. 어머니와 언니가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딸의 유서를 본 어머니는 주저앉았다. “그래. 우리 죽어도 다 같이 죽자.” 셋은 누더기 같은 이불을 함께 덮고 나란히 누웠다.
김은주 씨가 2012년 펴낸 자서전 ‘열한 살의 유서’ 한국어판.
‘가족 꽃제비’
아침이 되자 창가에 스며든 햇볕이 느껴졌다. 아직 죽지 않았다. 갑자기 어머니가 무엇을 발견한 양 벌떡 일어났다. 벽에서는 ‘위대한 수령’과 ‘친애하는 지도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초상화 액자 유리는 팔아먹었지만 초상화만은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수령과 지도자 사진을 사정없이 뽑아 불태워 버렸다. 금박 액자틀을 들고 밖으로 나가서는 약간의 먹을 것과 바꿔서 돌아왔다. 당장의 죽음은 면했지만, 그들은 집에서 살 수 없었다. 집에 그 초상화가 없다는 것은 죽음으로 씻어야 하는 정치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주 씨는 학교에 다닐 때 참관했던 어느 젊은 부부의 공개 총살형 장면을 떠올렸다. 6세, 8세 자녀를 둔 부부는 굶어 죽게 되자 마을에 있는 김 씨 일가 ‘말씀비’ 동판 글씨를 뜯어 내 팔려다 잡혔다. 처형이 끝난 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남은 애들은 곧 굶어 죽겠네. 정말 불쌍해.” 은주 씨는 이 수군거림을 들으며 ‘꼭 나쁜 사람만 처형되는 것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자신이 그런 운명에 처할 줄은 몰랐다.
어머니는 두 딸의 손을 잡고 집을 빠져나와 나선을 향해 떠났다. 그곳엔 바다가 있어 미역이라도 주워 먹자는 타산이었다. 살을 에는 북방의 찬바람을 견뎌내며 나선에 도착했다.
세 모녀의 처절한 생존 투쟁이 시작됐다. 아파트 계단, 다리 밑, 장마당, 역 앞이 이들의 잠자리였다. 겨울엔 산에 올라 땔감을 주워 장마당에 팔았고, 봄에는 산에 올라 풀뿌리를 캤다. 여름엔 농장 밭에서 감자나 고추를 훔치다가 몰매를 맞기도 했다.
나뭇짐을 지고 장마당에 나가던 어느 날, 마을 아이들이 은주 씨를 둘러싸고 “야, 여자 꽃제비가 왔다”고 놀리기 시작했다. 화가 났지만 곧 인정하고 말았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아, 나는 꽃제비구나.’
은주 씨처럼 가족이 몰려다니는 꽃제비는 ‘가족제비’라고도 불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은주 씨는 늘 눈시울이 붉어진다.
“1년 넘게 짐승보다 못한 그 모진 삶을 살면서도 어머니는 저와 언니를 버리지 않았어요. 엄마가 없었다면 12세, 14세인 우리 자매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김은주 씨는 파란만장한 삶을 헤쳐 왔지만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며 살려고 노력했다.
얼어붙은 물을 헤치며 탈북하다
1998년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시작됐다. 꽃제비에겐 가장 혹독한 계절이다. 어머니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은덕은 두만강 하구에 있어 강폭이 넓었다. 멀리 중국 땅이 바라보이긴 했지만 건널 생각은 못했다. 강을 넘다 잡히면 총살된다고 세뇌를 당해 공포가 심했다.
그럼에도 꽃제비 생활 초기인 그해 3월 은주 씨 가족은 도강을 시도했다. 하지만 강 가운데가 녹아 얼음이 떠다녀서 실패했다. 어머니는 다음 겨울 얼음이 얼었을 때 다시 건너자고 했다. 강폭이 좁은 상류로 갈 수도 있었지만 여행증 없이 지역간 이동이 쉽지 않았고, 익숙한 곳을 통해 탈북하려는 생각이 강했다.
1999년 2월 18일. 세 모녀는 두만강을 넘었다. 그 전날 산에 올라 경비대가 어디에 잠복 근무를 서는지 살펴봤다. 오전 5시 어머니가 일어섰다. 얼어붙은 강에 올라서자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피부 속 깊이 파고들었다. 돌아설 수는 없었다. 한참을 달리다 갑자기 얼음이 꺼지며 물에 빠졌다. 죽는가 싶었는데 발이 땅에 닿았다. 중국 쪽 실개천이었다. 물 밖으로 나오니 순식간에 옷이 꽁꽁 얼어붙었다. 달리려 해도 얼어붙은 옷 때문에 무릎을 굽힐 수 없었다. 일자 다리를 겨우 움직여 산에 올라 불을 피워 옷을 말렸다. 하룻밤을 산에서 묵었다.
아침이 되자 산 아랫마을에 내려가 집 문을 두드렸다. 첫 번째 집 40대 부부는 세 사람 행색을 보곤 밥을 줄 테니 먹고 가라고 했다. 마침 음력설이 지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이밥과 계란, 태어나 처음 보는 건두부볶음을 먹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을 줄 상상도 못했다.
“그때만 해도 강폭이 넓은 훈춘 쪽으로 탈북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중국 쪽 인심이 괜찮았어요. 굶어 죽어 가는 북한 사람들을 동정했고요. 그런데 2년쯤 지나선 훈춘 사람들도 더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강을 넘어온 북한 사람들이 도둑질에 강도질도 한다는 소문이 퍼져 탈북민을 경계했거든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배불리 먹은 이들은 다시 산에 올라와 숨었다. 어둠이 내린 뒤 산에서 내려와 큰길을 따라 걸었다. 길을 따라가면 도시가 나올 것으로 생각했다. 한참을 가는데 뒤에서 자동차 불빛이 나타났다.
‘숨을까. 아니, 벌써 봤겠는데 소용없지 않을까.’
잠시 망설이던 찰나 자동차가 그들 옆에 잠깐 멈춰 서더니 순식간에 언니를 낚아채 싣고 사라졌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소리 지를 새도 없었다.
이들에겐 방랑하면서 얻은 ‘예상치 못하게 헤어지면 반드시 헤어진 자리에서 머문다’는 원칙이 몸에 배어 있었다. 둘은 길 밖에 주저앉았다. 언니가 다시 온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이튿날 이른 새벽 쪽잠을 자던 은주 씨는 언니를 데리고 나타난 어머니를 발견했다. 저승사자를 보고 온 듯한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주 씨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했지만 입 밖 꺼낼 순 없었다. 세 모녀는 그날의 기억을 마음에 묻었다. 20년이 지난 뒤 은주 씨는 어머니와 당시를 회상했다. 어머니는 딸이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때 언니는 달리는 차에서 몹쓸 짓을 당하고 길에 버려졌어요. 굶주림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꽃제비 생활을 하며 체격도 뼈밖에 남지 않았고 생리도 시작하지 않았을 때였어요. 짐승들에게 걸린 거죠. 사탕과자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중국에 온 첫날 천국과 지옥을 다 경험했습니다.”
다시 뭉친 세 모녀는 길을 따라가다 새로운 마을을 만났다. 유독 가까이 다가와 친절하게 말을 거는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세 모녀를 자신의 집에 데려가 소풍 갈 때도 반쪽씩 나눠 먹을 수밖에 없던 귀한 달걀을 그릇 가득히 삶아 주었다. 갈아입을 옷도 줬다. 고마워하는 어머니에게 이 여인이 설득했다.
“이렇게 돌아다녀 봐야 잡혀서 북송될 수밖에 없다. 중국인과 결혼해야 보호도 받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내가 좋은 자리를 찾아 줄 테니 밖에 나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라.”
말을 들으니 옳은 소리였다. 어머니는 두 딸을 한참 쳐다보며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지나자 어머니보다 7세 많은 한족 남성이 찾아왔다. 세 모녀는 그를 따라나섰다. 자신들이 200위안에 팔렸다는 것은 1년 뒤에 알았다.
지난해 3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한 살의 유서’를 함께 펴낸 세바스티앙 팔레티 프랑스 일간 피가로 서울 특파원과 만난 김은주 씨.
북한에서 당한 쓰레기 취급
이들이 도착한 곳은 두만강에서 조금 떨어진 중국 투먼시에 속하는 시골 한족 마을이었다. 마을 전체가 친인척들로 엮여 있었다. 조선족은 한 명도 살지 않는 곳에서 은주 씨 모녀는 손짓발짓 소통하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은주 씨 의붓아버지가 된 한족 남자는 농사일을 했다.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문맹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한 번 장가는 갔는데 너무 가난해 여자가 달아났다고 했다. 이 마을과 인근 마을에도 북한 여성들이 여럿 팔려 와 살고 있었다. 남자는 대를 잇는 데 집착했다. 1년쯤 지나 42세이던 어머니가 임신해 2001년 아들을 낳았다. 은주 씨에게 남동생이 생긴 것이다.
궁핍한 곳에 팔려 와 사는 처지긴 했어도 잘 집이 생겼고 배를 곯지 않아도 됐고 남동생까지 생겼으니 북한에서 꽃제비 생활을 할 때보다 훨씬 나은 삶일 수 있었다. 가끔은 북한에서 온 거지라는 말을 듣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부모와 언니가 밭에 나가면 남동생 돌보는 일은 오로지 은주 씨 몫이 됐다.
하지만 탈북자 신세는 벗을 수가 없었다. 국경이 가까워서인지 수시로 중국 공안 차가 마을로 들어와 수색했다. 세 모녀는 멀리서 차 불빛이 보이거나, 개만 짖어도 산으로 도망쳐야 했다. 불안에 떨며 살다 2002년 3월 31일 끝내 공안에 체포됐다. 신고를 받은 모양인지 공안 차는 라이트를 켜지 않고 곧바로 은주 씨 집에 쳐들어 왔다. 개도 짖지 않았다. 투먼 변방수용소에 압송됐고 4월 5일 북한으로 끌려갔다.
북한 보위부에 들어가자마자 남녀노소 불문하고 옷을 벗고 알몸 검사를 당했다. 부끄러워하면 “쓰레기보다 못한 년들”이라며 발길질이 날아 왔다. 중국에서 3년 동안 ‘북한에서 온 거지’란 말을 들었는데 북한에선 인간쓰레기 취급을 당했다. 15~18㎡(5~6평) 남짓한 감방에 40명이 갇혀, 앉은 채로 자야 했다.
보름 남짓 조사를 받은 세 모녀는 함북 청진 집결소로 이송됐다. 젖먹이를 중국에 남겨 두고 온 은주 씨 어머니는 극심한 젖앓이를 하다 쓰러졌다. 어머니는 외딴 방에 넣어졌다. 약도 주지 않고 시간만 보내는 것이 어머니가 죽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청진에 살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도 이미 굶어 세상을 떠난 뒤라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야만의 땅에도 인간은 있었다. 함께 수감된 여인이 몰래 숨겨 둔 북한돈 150원을 손에 쥐여 주었다. 그 돈으로 수액 한 병을 겨우 구해 놔 주었더니 사경을 헤매던 어머니가 기적적으로 의식을 찾았다.
지난해 10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한 인권 향상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는 김은주 씨(가운데).
기적적인 재탈북
세 모녀는 두 달 만에 풀려났다. 보위부에서 이들 신분을 조사했지만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외지를 떠돌다 굶어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 지난 3년간 행방이 불분명하면 사망 처리를 하고 주민등록문건에서 지워버렸던 것이다. 만약 더 집결소에 있었으면 견디질 못했을 것이다.
당시엔 탈북했다 북송되면 거주지 보안서에 연락해 호송원을 불러 왔다. 하지만 호송원에게 여비도 주지 않아 누구도 며칠씩 걸리는 호송 임무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호송원이 없어 고향에 가지 못하고 집결소에서 몇 달씩 머무르다 죽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은주 씨 모녀에겐 너무나 다행스럽게 두 달 만에 은덕에서 호송원이 나타났다. 그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데리러 온 것이었지만 집결소에선 은주 씨 가족도 데려가라고 맡겨 버렸다. 호송원은 원래 호송 업무를 맡는 보안원도 아니었다. 보안원들이 하기 싫으니 규찰대 등으로 써먹던 노동자를 보낸 것이다. 예상치 못하게 세 명을 더 떠맡게 된 호송원도 난처해졌다. 은덕에 가는 며칠 동안 이들을 먹여 살릴 돈이 없던 것이다.
상황을 파악한 어머니가 길을 떠나면서부터 사정했다. “식량도 없지 않소. 은덕까지 꼭 갈 테니 우리를 놔 주시오.”
이 노동자도 애초에 받은 임무가 아니었고 거지 같은 세 여성을 데리고 가기도 싫었던 터라 그들을 놔 주었다. 그렇게 풀려난 세 모녀는 회령에 도착했다. 장마당에서 두 달 동안 한 번도 갈아입지 못해 이가 득실득실한 속옷도 나름 중국제여서 음식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들은 다시 두만강으로 갔다. 하지만 먹지 못해 판단력이 흐려진 어머니가 진짜 두만강을 다른 강이라 착각하고 강둑을 걸어가다 경비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막사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이튿날 아침 보위부로 끌려가게 된 어머니가 주저앉아 군인 다리를 부둥켜안고 사정했다. 이때 병실에서 나오던 한 군관이 다가왔다. 그는 자기 방으로 세 모녀를 데리고 가더니 “두만강을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고 당부하며 풀어 주었다. 말과는 달리 군관의 눈빛은 ‘잡히지 말고 성공하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두 번째 시도에서도 또 잡혔다. 어쩌다 헤어진 서로를 당황해서 찾다가 경비대원 눈에 띈 것이다. 끌려가니 그 군관이 또 있었다. 그는 사탕과자를 집어 주며 똑같은 말을 반복한 뒤 풀어 주었다.
세 번째 시도는 성공했다. 6월 3일 이들은 두만강을 넘어 걸어서 연길까지 갔다. 연길에서 어머니가 두 딸에게 물었다.
“그 집에 다시 갈 거니?”
업어 키운 남동생과 정이 든 은주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어머니가 결론을 내렸다. “그래. 일단 자식이 있으니 다시 가 보자.”
신고당해 북송됐던 그 집에 다시 가서 산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불안이 엄습했다. 얼마 뒤 언니는 인근 도시에서 보모 자리를 얻어 집을 나갔다. 은주 씨도 왕청의 한 케이크 가게에 자리를 잡아 마을을 떴다. 나중에 어머니도 연길의 한 치매 노인을 돌보는 자리를 얻어 마을을 떠났다. 셋이 처음으로 갈라졌다.
그해 추석에 일이 터졌다. 언니가 명절이라고 어머니를 찾아 마을에 다시 간 것이다. 돈을 주고 사 온 아내가 도망쳤다고 펄펄 뛰던 한족 남자는 “네 엄마가 도망갔으니 네가 내 아내가 돼야 한다”며 언니를 방에 가뒀다. 다행히 언니는 그날 밤 가까스로 도망칠 수 있었다.
김은주 씨(가운데)가 지난해 3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회의에서 북한 인권 실태를 증언하고 있다.
선발대로 한국에 오다
당시 연길에서는 탈북자를 색출해 검거하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제 중국말도 잘할 수 있게 된 세 모녀는 내륙 깊이 들어가기로 했다. 2003년 대련으로 왔다. 어머니는 또 노인 요양사 일자리를 얻었고 언니는 식당에 취직했다. 은주 씨는 전단 돌리는 일을 잡았다.
은주 씨는 대련에서 대형 마트를 처음 가 봤다. 여름에 마트에 들어가면 시원해서 좋았다. 돈이 없어 물 한 병 사고 나오면서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언젠가는 저들처럼 카트에 물건을 가득 사서 나올 거야.’
셋은 1년 넘게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았다. 어머니는 겨울 어느 날 2000위안을 들고 투먼으로 갔다. 아무리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아들이 있으니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도착하자마자 남자는 “지금까지 번 돈을 내놓으라”며 마구 때렸다. 돈 숨긴 데를 불 때까지 안 풀어 주겠다며 한겨울에 신발도 안 신긴 채 쇠사슬로 꽁꽁 묶어 버렸다. 보다 못한 이웃들이 풀어주라고 호통을 쳐서 어머니는 풀려날 수 있었다.
2004년 이들은 상해로 거처를 옮겼다. 언니가 먼저 가서 어느 한국인 아이를 봐 주는 자리를 잡은 뒤 가족을 불렀다. 상해는 대련보다 훨씬 번화한 도시였다. 월급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은주 씨는 한 탈북 여성을 알게 됐다. 어느 날 그 여성이 지인 중에 탈북자를 한국으로 보내주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은주 씨는 그동안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면서 한국에 무척 가고 싶었지만 연줄이 없어 뜻을 이룰 수 없었는데 뜻밖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은주 씨는 어머니, 언니와 상의했다. “우리 셋이 가다 잡히면 끝장이다. 한 명이 잡히더라도 다른 가족이 살아 있어야 돈을 보내서라도 구출할 수 있으니 일단 한 사람은 남아 있자.”
은주 씨와 어머니가 먼저 한국으로 떠나게 됐다. 2006년 5월 다른 일행 3명과 함께 브로커를 따라나섰다. 몽골 고비사막을 횡단하는 길이었다. 큰 사고 없이 몇 시간 만에 몽골 국경수비대에 체포돼 수용소로 갔다.
수용소에는 사막을 넘다 일행을 잃은 사람도,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절단한 사람도 있었다. 운이 나쁘게 은주 씨가 간 시점에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몽골 방문이 예정돼 있어 탈북민 한국 인도가 계속 늦춰졌다. 중국에서 얻은 지병 때문에 수용소에서 죽은 탈북민도 있었다.
다른 탈북민 70여 명과 함께 4개월을 몽골 수용소에서 지냈다. 수용소에서 만 20세 생일을 맞은 그는 보름 뒤인 9월 1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조사를 마치고 사회에 나오니 그해 12월 28일이었다. 서울 강서구 한 임대주택에 짐을 풀었다. 2008년엔 언니도 무사히 도착했다.
은주 씨의 한국 생활은 배움으로 시작됐다. 2007년 고등학교 2학년으로 진학했다. 네댓 살 어린 학생들과 공부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자신에게 쏠리는 전교생의 관심도 부담스러웠다.
“제가 다닌 고등학교에 들어온 두 번째 탈북 학생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나타나면 동물원 관람하듯 모두가 쳐다봤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탈북민에게 관심이 많은 줄 알았는데, 대학에 가니 관심 두는 사람도 없고 질문하는 사람도 없어 놀랐어요.”
쏠리는 시선에 반비례해 학업을 따라가기 힘들어 눈물도 많이 흘렸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기간 중학교에 다니지 못했으니 배우는 것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북한은 누구나 고등 교육을 받는 나라라고 밖에다 자랑하지만, 고난의 행군 때엔 배고픈 아이들이 학교에 가질 않으니 문맹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오기로 공부에 매달렸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영어였다. 교재를 무작정 외웠다. 피나는 노력으로 꼴찌로 시작했지만 마지막 기말고사에선 100점 만점에 90점을 받았다.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는 시간이 왔다.
“정말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아동심리학자, 변호사, 수의사, 디자이너 같은 온갖 미래가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여기 아이들이 꿈이 없다는 것이 저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진로를 고민할 때 담임선생님이 “남보다 중국어를 잘하니 그걸 살리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조언을 따라 그는 2009년 서강대 중국문화학과에 진학해 심리학을 복수 전공했다. 대학 시절 꿈은 아동심리학자였다. 북한과 중국에서 겪은 탈북 과정에서 상처를 입고 위축돼 방황하는 아이들을 많이 봤다. 자신도 어린 시절 받은 상처가 너무 컸다. 아동의 마음을 치료하고 희망을 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 꿈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 대학 시절 자원봉사자로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활동하면서 북한 현실을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북한 현실은 곧 그가 걸어온 길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책으로 적었다. 첫 저서 제목은 ‘열한 살의 유서’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자신도 죽음의 문턱에 갔을 때 썼던 유서는 지금도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이 책은 세바스티앙 팔레티 프랑스 일간 피가로 서울 특파원과 공동으로 쓰고 2012년 프랑스 출판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한국어 영어를 비롯한 8개 국어로 출간됐다.
책 출판을 계기로 북한 인권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 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을 보내고 졸업은 2014년 2월에 했다. 졸업 성적도 만족할 만큼 잘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니 28세가 됐다. 결혼 적령기가 된 것이다. 대학생 때부터 알고 지낸 탈북민 출신 남성과 2015년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은 현재 통일부 6급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아이들도 태어났다. 11세, 6세 자매의 어머니다.
육아로 힘든 시기에도 대북 방송국 작가로 활동하며 270편의 원고를 썼다. 지난해엔 북한이탈주민 글로벌교육센터(FSI) 간사도 맡았다. FSI는 북한 생활이나 남한 정착 과정 같은 이야기를 영어로 나누고 싶어 하는 탈북민에게 원어민을 짝지워 주고 영어 말하기 훈련을 무료로 제공한다. 탈북민이 국제 사회와 직접 소통해 북한 인권 실태를 알리게 하는 게 목표다.
은주 씨는 지난해 3월 유엔 북한인권조사위(COI) 보고서 발간 10주년을 맞아 주제네바 한국 대표부가 주최한 인권 행사에 증언자로 참가하게 됐다. 북한에서 11세에 유서를 써야 했던 소녀가 각국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창한 영어로 북한 인권 실태를 고발했다.
“너무 과거 이야기만 하는 것 아닌지 고민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한국에 온 탈북민들을 보면 북한 인권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하고 있더라고요. 먼저 온 우리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북한에서 또 다른 11세 소녀들이 유서를 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용기를 냈습니다.”
은주 씨는 올해 3월 통일부 북한인권증진위원에 지난해에 이어 연임됐다. 피할 수 없어 시작한 일이지만, 지금까지는 운명이 계속 그 길로 이끌고 있다.
“15년 가까이 북한 인권 활동을 했습니다. 수많은 강연을 다니며 제 이야기를 했는데, 하고 나면 어두운 기억이 떠올라 정신적으로 괴로웠습니다. 북한 인권은 하루 빨리 해결돼야 할 문제이지 제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일 순 없지 않습니까. 저는 귀농해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농촌에서 북한 인권 활동을 하며 몸과 마음이 지쳤을 실무자들을 위한 쉼터를 가꾸고 싶습니다. 아직까지는 공무원 남편 때문에도 그렇고, 경제적 여유도 없어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있네요.”
고향의 어두운 기억은 그를 힘들게 한다. 통일이 돼도 고향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에게 고향은 아버지 무덤만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뒷산에 마구 묻힌 수많은 무덤 속에서 묘비도 없이 묻힌 아버지 무덤을 찾을 자신도 없다. 그런 괴로움을 딛고 올해 5월 다시 유엔에 가서 북한 외교관들 앞에 섰다.
“배신자, 쓰레기 소리는 각오했지만 막상 듣고 나니 화가 나더군요. 어떻게든 고향에서 살아남으려 애쓴 저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탈북할 수밖에 없게 만든 자들이 그런 말을 하니까요. 이 인터뷰 기사를 그 북한 외교관들이 봤으면 좋겠어요. 유엔에서 길게 얘기할 순 없었지만, 저들도 북한 주민과 수많은 탈북민이 어떤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는지 꼭 알았으면 해요. 그들은 저를 부모와 가족조차 내버린 쓰레기라고 말했지만, 저는 북한이 쓰레기로 버린 가족과 어떤 역경에도 헤어지지 않고, 기어코 함께 한국에 온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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