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씨가 1983년에 외동딸로 태어났을 때 부친은 운수사업소 지도원이었고, 모친은 의사였다. 아버지는 추방자 신분이었다.
이 씨의 할아버지는 원래 강원도에서 학교 교장을 지냈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마을을 담당하는 유부남 안전원(경찰)이 미혼인 여교사와 불륜 관계인 것을 알게 됐다. 당시 북한에선 불륜을 매우 큰 범죄로 간주했고, 군중 비판 대상이었으며 처벌 수위도 강했다. 안전원에게 여교사의 신세를 망치지 말라고 경고했다.
교장이 껄끄러웠던 안전원은 틈만 노리다가 마침내 기회를 잡았다. 할아버지의 친구 한 명이 한국 라디오를 듣다가 체포됐는데, 할아버지도 간첩 내통자로 몰아간 것이다. 할아버지를 따라 18세였던 아버지도 함께 산골로 추방을 왔다. 사실상 유배인 셈이다.
할아버지의 입바른 소리 덕분에 출신 성분이 나락으로 떨어졌음에도 아버지는 나름 북한 체제에서 영리하게 살아남았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준의사가 된 여성과 결혼에 성공했다. 북한은 의사에 대한 대우가 높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결혼한 뒤 이 씨의 부친은 러시아에 두 차례나 다녀왔다. 첫 번째는 이 씨가 4살 때 벌목공으로 파견돼 갔다가 7살 때 돌아왔다.
두 번째는 이 씨가 15살 때인 1998년에 갔는데, 이때엔 북러 합작회사의 경리로 취직해 많은 재물을 벌어왔다. 러시아에 벌목공으로 갔던 노동자들은 귀국할 때 돈 대신 북한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온다. 돈을 갖고 오면 이래저래 뺏길 가능성이 컸지만, 물품은 집에 쌓아두었다가 차츰 팔아서 식량과 바꿔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씨는 아버지가 가져온 러시아 사탕을 거의 10년 동안 먹었고, 러시아제 비누도 10년 넘게 썼다. 고난의 행군 때 아사자들이 적잖게 속출하는 가운데서도 이 씨 가족은 러시아에서 가져온 오토바이와 전축, 소파, 침대, 이불 천, 카펫 등을 팔아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다.
2018년 한 탈북민 간담회에 나간 이 씨가 카메라 앞에 마주 앉았다.
● 노동당 방송원이 되다
학교 시절의 이 씨는 책을 좋아하는 문학소녀였다. 2000년에 중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기능공학교라고 불리는 2년제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 시골엔 대학 추천권이 아예 내려오지도 않았다.
19세에 전문학교를 졸업했지만, 마땅히 갈 곳도 없어 1년 넘게 집에서 놀았다.
그러다가 21세에 도 방송위원회 3방송 방송원(아나운서)으로 취직하게 됐다. 앞서 방송원으로 있던 여성이 결혼하는 바람에 그 자리가 공석이 됐는데, 기자 한 명이 평소에 이 씨의 화술 실력을 봐두었다가 추천한 것이다. 이 씨는 2003년 1월 도당 간부부의 비준을 받아 정식으로 방송원에 임명됐다.
도 방송위원회는 각 군에 2~3명의 기자와 1명의 방송원 겸 엔지니어를 두고 있다.
북한은 모든 가정과 사무실에 유선으로 연결된 스피커를 의무적으로 설치하게 한다. 이 스피커에선 아침 5시부터 밤 10시 30분까지 중단 없이 방송이 나온다. 스피커에 끄는 기능이 아예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침 5시엔 스피커 소리를 들으며 깨어나야 하고, 밤에 스피커가 꺼져야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그렇다고 스피커를 공짜로 나눠주는 것도 아니다.
이 씨가 방송원이던 시절에는 쌀 2㎏이상을 살 수 있는 북한돈 3000원에 구입하게 했다. 북한에서 살려면 내일 굶어죽어도 오늘은 스피커를 무조건 사야 했다.
북한의 3방송 체계는 땅에 지선을 묻어 미세한 전류로도 방송이 전달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래서 1년 동안 전기가 오지 않아 암흑 속에서 살아도 스피커에선 이에 상관없이 체제를 찬양하는 방송이 나온다.
하루 16시간 30분 방송시간의 대다수는 중앙에서 운영한다. 즉 북한 전역에서 똑같은 방송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1시간은 지방의 특색을 반영한다며 각 도 방송위원회가 자체로 제작한 프로그램을 끼워 넣게 한다.
지방 방송 한 시간 중 40분은 도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을, 20분은 각 군이 자체 제작 프로그램으로 채운다. 이 씨가 함께 일하는 기자 2~3명은 이 20분짜리 프로그램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씨는 이들이 써온 “군의 어느 협동농장 관리위원회가 일을 잘 해서 계획을 넘쳐 수행했다”는 형식의 원고를 읽어주는 일을 했다.
북한에서 방송 아나운서는 ‘당의 목소리’라고 불렀는데, 실제로도 목소리만 존재하는 직업이었다. 어디 가서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어도, 방송원이라고 하면 다들 목소리는 귀에 익어 반가워했다.
월급이나 배급은 받을 때도 있고, 받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20대 처녀가 얻을 수 있는 직업치곤 꽤 좋은 직업이었다. 밀폐된 방송실에 붙어있는 것이 싫긴 했지만, 오후 3시면 퇴근이 가능했고, 주말도 쉴 수가 있었다. 일반 기업소에 간 다른 동창들은 시도 때도 없이 각종 동원에 끌려 다녔다.
처음엔 방송원 6급으로 시작했다가 2년이 지나니 5급으로 승진도 했다. 물론 5급이 됐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월급이 몇백 원 오른 것이 전부였다. 집안 형편이 좋았다면 계속 방송원을 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외동딸인 그가 집안 살림에 뭔가 기여를 해야 했다.
2006년 그는 결혼을 핑계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당시 사귀는 사람이 있었다. 군인이었는데, 결혼식 날짜까지 다 잡아놓은 뒤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할아버지가 북한 법에 의해 처형된, 처단자 손자라는 것이었다. 6.25전쟁 때 치안대 등 국군 편에 섰던 사람들의 경우 본인은 처형되고, 가족까지 대대손손 그 누명을 쓰고 살아야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가 결혼을 극구 반대했다.
“나도 출신성분이 나쁜 네 아버지에게 속아 결혼해 이 산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너까지 그렇게 살게 할 순 없다. 그리고 너만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자식들까지 평생 산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출세도 못하고 살아야 한다.”
결국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둘의 결혼식은 없는 일이 되었다
“돈이나 열심히 벌어야 겠다”고 결심한 이 씨는 장사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산골에서 마땅히 할 수 있는 돈벌이는 없었다.
그는 밀수에 뛰어들었다. 내륙 쪽에서 차량으로 들어오는 밀수품은 단속이 심한 국경까지 접근하지 못해 이 씨가 사는 마을까지만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걸 메고 국경까지 날랐다. 구리, 니켈, 폐철, 약초 등 온갖 밀수품이 들어왔다. 100리나 되는 길을 산을 타고 다녔는데,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견딜 수 없는 일은 수시로 단속에 걸려 물품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보안원들과 이들이 고용한 규찰대는 가끔 산길에 매복해 물건을 빼앗았다. 빼앗은 물건은 일부는 성과를 위해 바치고, 일부는 자기들이 빼돌려 다시 팔아먹었다. 3년 동안 밀수를 열심히 했지만, 빼앗긴 것을 계산하면 얼마 벌지도 못했다. 벌어서 쌓아 놓으면 없어지는 반복의 굴레였다 .점점 체제에 환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08년 월 40%의 사채를 빌려 장사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동업자가 사라졌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때 중국에서 제안이 왔다. 연길에 와서 옷을 선별해주면 매달 500위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눈에 뵈는 게 없는 때라 선뜻 응했다.
밤에 두만강을 넘어 연길에 들어가니 어느 창고로 보냈다. 그 창고는 동북 3성에서 기부를 받은 옷들이 도착하는 곳이었다. 중국 학교에선 난민구호물품이라는 핑계로 학생들에게 옷을 걷었는데, 이걸 트럭 하나당 210위안씩 주고 업자들이 몰래 빼돌려 팔아먹는 것이었다.
이 씨가 하는 일은 옷을 선별해 2위안, 5위안, 10위안짜리 마대에 담는 것이었다. 새 옷이나 비싸 보이는 옷은 10위안, 낡은 옷은 2위안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그렇게 선별된 옷 마대는 북한에 밀수로 넘어갔다. 북한 장사꾼들이 그 마대를 넘겨받아 다시 전국의 장마당에 팔아 이윤을 남겼다.
이 씨는 그곳에서 아침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14시간을 일했다. 너무 고된 일이라 하루에 네 끼씩 먹어도 배가 고팠다. 창고는 늘 먼지로 꽉 찼지만, 마스크도 없이 일을 했다.
그렇게 몇 달 동안 몸을 갈아 넣는 일을 하고 번 돈을 갖고 다시 북에 돌아왔다. 그 돈으로 양강도 혜산 시내 변두리에 작은 단칸방을 하나 구입했다. 시내에 집이 없으면 부모님을 시골에서 해방시킬 수 없었다.
도시에 나오니 몸을 쓰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다. 그는 중국제 휴대전화를 하나 사서 중국이나 한국에서 북한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는 일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북한 가족에게 돈을 보내면 중국에서 돈을 받는 사람이 10%, 북한에서 돈을 넘겨받는 사람이 10%, 가족과 연결해 돈을 전달해주는 사람이 10%를 가졌다. 신용이 축적되니 일감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체포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지만, 대신 한꺼번에 많은 돈을 만질 수가 있었다.
2019년 한 라디오 채널에 출연해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는 이 씨.
● ‘처녀 연금술사’
그렇게 점차 모은 돈으로 그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앞쪽 지역에 사는 사람을 통해 금을 제련하는 방법을 알게 됐고, 집에서 금을 제련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32㎞ 떨어진 곳에 금 광산이 있었다. 광산 사람들은 금 정광을 곡괭이로 파서 이를 파쇄해 몰래 팔았다. 이 씨는 이곳에 가서 20㎏짜리 정광 한 배낭을 북한돈 1만 원씩에 샀다. 그리고 전문 짐꾼으로 일하는 사람을 고용해 집에 메고 왔다. 적을 때는 100㎏, 많을 때는 200㎏을 가져왔는데 차로 싣고 오면 단속될 수가 있기 때문에 왕복 140리를 짐꾼 5~10명이 걸어서 오갔다.
집에 도착하면 미리 마련해둔 시멘트 저장탱크에 정광을 넣고 제련에 들어갔다. 공정은 쉽지 않았다. 정광을 청산가리로 녹인 뒤, 쌀알처럼 작게 부순 바나나 껍질 숯을 넣으면 금가루가 여기에 스며든다. 이걸 다시 전분 가루에 버무려 떡처럼 만들어 말리고, 자체로 만든 용광로에서 녹인다. 온도를 섭씨 3000도로 맞춰야 하기 때문에 혜산에서 제일 좋은 고열탄을 사서 써야했다.
이렇게 녹인 시꺼먼 덩어리를 찬물에 넣었다가 다시 두드려 부수고 납 성분만 남은 것을 다시 전기로에 넣어 용해시킨 뒤 질산 처리를 하면 연은 증발하고, 순도 95%의 금이 남는다. 이런 중세적인 제련 과정은 꼬박 이틀이 걸렸다.
제일 중요한 것은 금을 많이 함유한 정광을 사오는 일이었는데, 이 점에선 이 씨의 눈썰미가 탁월했다. 몇 번하다 보니 정광을 고를 때 이 정도에선 금이 어느 정도 나오겠다는 것이 가늠이 됐다. 한번 금을 뽑으면 보통 본전 대비 세 배 이상이 남았고, 운이 나빠도 두 배는 뽑았다. 혜산에 이렇게 몰래 금 제련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씨는 똑같은 정광에서도 금을 많이 뽑는다고 업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다.
2009년 여름은 꼬박 금 제련에 빠져들어 살았다. 그러나 독극물인 청산가리와 납을 변변한 보호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다루다보니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기침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그때 그는 독극물이 몸에 얼마나 나쁜지를 잘 알지 못했다. 설사 알았어도 돈을 벌기 위해 했을 것이었다. 그의 목표는 혜산 시내에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있는 번듯한 아파트를 하루빨리 장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
2021년 국회의 모 의원실을 방문해 찍은 사진.
● 눈뜨고 강탈당한 전 재산
그해 가을 집에 분주소(파출소) 당 비서가 불쑥 문을 차고 들어왔다. 마을의 누군가가 신고를 한 것이었다. 하필 당 비서는 악독하게 돈을 빼앗아 먹기로 소문나, 사람들이 “전쟁이 나면 저 놈부터 죽인다”고 욕을 하는 독종이었다.
마당에 들어온 비서는 눈이 휘둥그레 졌다. 한바탕 고함을 지르더니 이를 덮어주는 대가로 얼마를 뇌물로 줄 수 있을지 넌지시 떠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이 씨가 모든 자본을 다 투자해 정광을 많이 사다 놓은 날이었다. 미처 대답을 못하고 있었는데, 비서는 뇌물을 줄 의향이 없다고 받아들였는지 집에 있던 짐꾼들을 모두 잡아 분주소로 데려갔다.
좀 있다가 차를 6대나 끌고 보안원들을 모두 동원시켜 그의 집에 왔다. 그들은 모든 것을 뜯어갔고, 심지어 집 앞 흙까지 파갔다.
당 비서는 “큰 것을 잡았다”고 기고만장했다. 북한 사람들은 “숨을 쉬는 것을 빼곤 다 불법이다”고 처지를 한탄한다.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장사도 다 불법인데, 그중에서도 금과 송이를 다루면 특히 엄중하게 처벌한다. 북한에서 금과 송이는 노동당만이 헐값에 사서 외국에 팔 수 있다. 개인이 이를 다루면 역적처럼 취급했다.
분주소에 끌려간 이 씨는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다행히 빼앗긴 것이 아직 금을 빼지 않은 돌가루에 불과한 것이라 금을 판 역적까진 되지 않았다. 돌려달라고 사정하니 보안원이 “저 흙이랑 같이 분주소 앞마당에 파묻기 전에 당장 꺼지라”고 호통을 쳤다.
분주소에서 석방돼 걸어오는 이 씨를 보고 온 마을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불법적인 일을 했다고 비웃는 것이 아니라 “다 빼앗겼으니 이제 쟤는 어떻게 사냐”고 동정하는 것이었다.
목숨 걸고 여름 내내 번 돈을 모두 빼앗기고 나니 살 생각이 없어졌다. 난생 처음 그는 목청껏 울었다. 집에 온 그는 아버지 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했다. 충격으로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다. 일주일 동안 그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다 빼앗기고 집에는 식량 10㎏만 남아있었다.
탈북하기 전에 보니 이 씨가 빼앗긴 정광은 분주소 마당에 깔려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 비서는 혜산에서 금 뽑는 사람들을 몰래 수소문해 찾아가 금을 뽑아달라고 했다. 혜산에서 금을 뽑는 사람들마다 방식이 조금씩 다 달랐는데, 업자들은 “저걸로는 금을 뽑지 못 한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실은 엮이기 싫어 거부한 것이다.
비서 눈에는 분명 금흙인데, 금을 뽑지 못한다고 하니 화가 난 것일까. 결국 그 흙은 마당에 깔렸다. 금을 밟고 사는 기분이라도 내려 한 것일까.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모든 것을 빼앗겨 하늘이 무너진 순간에 뜻밖에 큰 일거리가 들어왔다. 한국에 있는 사람이 북한 가족에게 큰 돈을 보냈고, 이 씨가 그 심부름을 하게 된 것이다. 액수가 큰 만큼 떨어지는 몫도 컸다.
그 돈으로 이 씨는 새로운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시작하자마자 다시 벼락이 떨어졌다.
2009년 11월 30일 북한 당국은 기습적인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기존 북한돈 100원을 새 화폐 1원으로 바꾸되, 가구당 교환 한도를 10만 원으로 못 박았다.
화폐 개혁 직전 쌀 1㎏은 2500원, 달러 환율은 3500원 정도였다. 쌀 40㎏ 정도 살 수 있는 돈만 바꿔주고, 나머지 돈은 휴지가 된 것이다.
북한의 모든 도시가 그랬지만, 밀수로 먹고 사는 도시 혜산은 특히 더 큰 충격에 빠졌다. 무용지물이 된, 김일성 얼굴이 박혀 있는 지폐 뭉치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속출했고, 분노에 찬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당국을 욕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을 희생양으로 삼아 공개 처형했지만, 화폐 개혁 같은 엄청난 일을 당 부장이 혼자서 추진했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이 씨는 장사를 하면서 돈을 인민폐로 받았다. 그런데 압수수색의 공포를 겪은 모친이 중국돈을 축적하면 또 빼앗길까봐 이 씨가 몰래 다시 북한 돈으로 다 바꾸었다. 화폐 개혁 발표 이후에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이 씨는 망연자실했다. 집 한 채를 살 돈이 또 날아간 것이다.
주저앉아 울새도 없었다. 쌓아둔 북한 돈을 몽땅 시장에 갖고 나가 콩기름 30㎏과 바꾸었다. 화폐 개혁 당일은 난리가 났다. 부자들은 기존 지폐를 헐값으로 시장에서 팔고, 10만 원도 없던 사람들은 이를 싸게 사서 교환했다.
재빨리 콩기름과 바꾼 것도 천만다행이었다. 다음날이 되니 시장에서 물건이 사라졌다. 널뛰는 환율 때문에 식량조차 사라져 돈을 줘도 살 수가 없었다. 이때 이 씨는 처음으로 며칠을 굶어봤다. 다행히 쥐고 있는 것이 콩기름이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식량과 물물 교환하긴 쉬웠다.
이 씨는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젊음과 몸을 갈아 넣으며 버텼는데, 당국은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마음 같아선 백 번 죽고 싶었지만, 외동딸만 바라보는 부모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다시 장사에 뛰어들어 이전부터 오래 알고 지내던 밀수꾼과 동업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그를 눈 여겨 보던 마을 아줌마가 다가왔다.
“연아야. 우리 아들 좀 맡아줘.”
그때 이 씨는 28세로 북한에서 노처녀 취급을 받는 나이가 됐다. 남자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의 여동생이 한국으로 이미 가서 돈을 보내주는 ‘한라산 줄기’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 선을 통해 언젠가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어느 날 갑자기 시어머니가 사라졌다. 아들을 이 씨에게 부탁해놓고, 본인은 딸을 찾아 한국으로 간 것이다.
이 씨도 더는 북한에 머물기 싫어졌다. 그는 남자를 먼저 장백으로 건네 보냈다. 그가 시어머니가 이용한 한국행 선을 찾으면 뒤따라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불행하게도 압록강을 넘은 다음날 바로 체포돼 북송됐다.
보안원들이 이 씨를 잡으려 왔지만, 그는 겨우 도망쳐 숨었다. 하지만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뿐이었다. 그는 도강 브로커를 찾아갔다. 당시엔 혜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망칠 때라 브로커 ‘사업’이 최고로 활성화됐던 때였다. 브로커는 강을 넘을 12명 팀에 그를 끼워 넣었다.
2011년 11월 이 씨는 가슴까지 오는 압록강에 뱃속에 품은 새 생명과 함께 뛰어들었다. 함께 온 다른 탈북민들과 달리, 이 씨는 장백에 찾아갈 집이 있었다.
시누이와 시어머니를 한국으로 보내준 그 집을 찾아가니 한국에 도착하면 한국돈 250만 원을 달라고 했다. 그게 얼마나 큰 돈인지는 감이 오지 않지만, 그러겠다고 했다. 그렇게 이 씨는 운 좋게도 강을 넘자마자 한국행 길에 오를 수 있었고, 불과 1주일 만에 태국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태국에 도착해 한 지방 경찰서에 잠시 수감돼 있을 때였다. 트럭 한 대가 와서 막 태국에 도착한 탈북 여성들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먼저 탈북한 시어머니가 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중국까지 마중 나온 시누이와 함께 몇 달 중국에서 놀다가 태국으로 온 것이다. 이 씨도, 그를 태국에서 만난 시어머니도 동시에 얼어붙었다.
“내 아들은?”
아들의 체포 소식에 서먹서먹해진 두 사람은 함께 태국 감방에서 있었고, 2012년 1월에 한국에도 같이 왔고, 하나원에도 같이 들어갔다. 그 사이 이 씨의 배는 점점 불러갔다. 그의 사연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애를 지우고 한국에서 새로 시작하라고 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하나원에 가니 시어머니의 집착이 시작됐다. “뱃속의 애는 내 손자인데, 절대 지울 수 없다”고 계속 따라다녔다. 하도 심하니 하나원에서 이 씨를 먼저 산후조리원에 보내 둘을 떼어놓았다.
산후조리원에서 이 씨는 계속 갈등했다. 처음엔 애를 낳고 입양을 보낼 생각을 했다. 부모님을 북에 두고 온 자신이 아무도 없는 이 땅에서 좋은 부모가 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후조리원에 있다보니 그곳엔 외국에 입양을 갔다가 부모를 찾으러 온 사람들이 계속 왔다. 그들의 절절한 사연을 접하다보니 어느새 마음이 바뀌었다.
“내 아이도 커서 엄마를 찾아다니게 할 순 없어, 이 애는 내가 키워야겠다.”
이 씨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출생한 딸을 데리고 나왔다. 2012년 7월 서울 강북의 작은 임대아파트에 한국 생활을 동시에 시작하는 엄마와 딸이 보금자리를 틀었다.
집을 받고 들어가니 먼지가 가득했다. 애를 눕히고 방바닥을 닦으며 이 씨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우리 함께 이 땅에서 고생을 이겨내 보자.”
처음엔 아무 것도 없었다. 이불도 없었고, 분유도 없었다. 돈을 벌려니 애 때문에 나갈 수가 없었다. 벼룩시장을 뒤지며 집에서 할 수 있는 별의별 부업을 다 찾았다. 밤새 악세사리를 붙이고 바느질을 했다. 이런 일감도 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때엔 한 달에 10만 원으로 살 때도 있었다. 월 100만 원쯤 벌면 북에 있는 부모에게 돈을 보냈다.
경기도에 자리 잡은 시부모는 어떻게 찾아냈는지 하나원을 졸업하자마자 찾아와 “우리가 북에 있는 아들을 데려올 것이니 애도 함께 키우자”며 접근해왔다.
하지만 막상 북에 연락을 하니 아들은 그가 사라진 지 얼마 안 돼 딴 여성과 살림을 차렸다. 홀로 살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북에서 새 장가를 갔지만, 그 사람을 크게 원망하진 않습니다. 어찌됐든 한라산 줄기 덕분에 제가 한국에 올 수 있는 선을 알게 됐고, 부모님도 데리고 왔으니까 덕을 본거죠. 계속 찾아오던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애한테 안 좋은 영향을 주니 강제로 못 오게 했습니다. 아들이 딴 여자와 결혼했는데도 자꾸 와서 참견하는 게 너무 지나쳤거든요.”
한국에 온 탈북민의 최대 목표는 북에 남은 가족을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이 씨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애를 키우며 돈을 모으긴 쉽지 않았다.
결국 이 씨는 이듬해 임대아파트를 내놓고 돌려받은 보증금으로 부모를 북한에서 데려올 수 있었다. 부모는 무사히 한국에 왔고, 부모 집에서 살게 되니 아이를 돌봐주는 부담을 크게 덜게 됐다.
이때부터 그는 구직활동에 열심히 뛰어들어 2015년 한 공공기관에 취직했다. 지금은 10년째 한 곳에서 일하고 있다. 2021년 이 씨는 38세에 늦깎이로 대학을 졸업했다.
“제가 애를 키우면서 우울증이 심하게 왔습니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그걸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저는 해냈습니다. 살면서 주변을 돌아보니 우울증이 걸린 사람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우울증 걸린 사람들이 자생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되자고요. 제가 이겨낸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이겨낼 수 있게 힘을 주고 싶어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습니다.”
어느새 딸은 13세가 됐다. 갓난아이라도 북에서 태어나면 장학금 등 탈북민 혜택이 있지만, 북에서 임신해 한국에서 태어나면 아무런 혜택이 없다. 그래도 든든한 직장 덕분에 애를 키울 수 있었다.
엄마의 ‘한국 나이’는 딸과 같은 13세이다. 서울에서 10년차 직장인으로 살고 있는 그가 앞으로도 회사원으로 계속 살지, 아니면 우울증을 걸린 사람들을 보듬는 심리 상담사가 될지 알 순 없다. 분명한 것은 그의 뿌리는 계속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땅에 점점 더 굳세게 박혀, 흔들리지도, 넘어지지도 않는 한 그루의 거목으로 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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