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 미국 비자를 발급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 정부가 비자 문턱을 높이면서 업무나 학업 목적으로 미국을 방문하려다 비자 발급에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우리 회사는 물론이고 내가 아는 다른 회사까지 범위를 넓혀 봐도, 미국에 H-1B(전문직 임시 취업비자)나 주재원 비자를 발급받아 출장이나 단기 파견을 갔다는 사람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한 기업 관계자는 8일 미국 비자 취득의 어려움을 설명하며 이같이 밝혔다. 미국에선 한국인 대규모 구금 사태에 대해 “합법적인 비자 없이 공장 건설에 참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미국이 비자 규제를 강화한 현재 상황에선 합법적인 비자를 받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미국 이민 당국은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HL-GA)에서 대대적인 단속을 벌여 ESTA(전자여행허가제)나 B1(단기상용) 비자를 소지한 한국인들을 체포해 구금했다. 하지만 이 같은 대규모 구금 사태를 초래한 배경 중 하나로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더 높아진 미국 비자 문턱이 꼽힌다. 미국 출국을 앞두고 적시에 비자를 얻지 못하는 이른바 ‘미국 비자 포비아’ 현상까지 나타나면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업계에선 “비자 발급 불가능” 호소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 미국은 지속적으로 비자 문턱을 높여 왔다. 미 당국은 비자 발급을 신청한 이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공개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모든 비자 신청자는 최근 5년간 SNS 계정 정보를 제출하고 계정을 ‘공개’ 상태로 전환해야 한다. 지난달 27일 미 국토안보부는 외국인 학생(F비자)과 교환 방문자(J비자)의 비자 유효 기간을 학업 프로그램 기간으로 한정하되 최대 4년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규정안을 발표했다. 외국 언론사 주재원(I비자)의 체류 기간도 240일까지만 허용하기로 했다.
미국 파견이나 출장이 잦은 기업들은 “미국이 적법하다고 말하는 비자들은 사실상 받는 게 불가능하다”고 호소했다. 한 제조업체 관계자도 “경제활동이 가능한 비자를 받으려면 사실상 미국 법인에 고용 계약을 맺으라는 얘기인데, 단기 파견이나 출장 가자고 미국 법인 소속으로 회사를 옮겼다가 업무가 끝나면 다시 한국 법인으로 이직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특히 이번 조지아주 배터리셀 공장 사태처럼 공장 건설 등 준비 단계에서 일하는 근로자의 경우 하청업체 직원이 다수 포함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비자 발급은 더욱 ‘먼 나라 얘기’가 된다고 기업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또 다른 제조업체 관계자는 “미국에 법인이 진출해 있는 대기업은 그나마 미국 법인에서 초청장을 보내거나 신원을 증명해주면 단기 상용 비자인 B1 비자 발급이 ‘상대적’으로 수월해진다”며 “하지만 미국 법인이 없는 중견기업 직원들은 이마저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ESTA 말고는 사실상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 조현 “비자 문제, 美 투자 선결 과제”
정부와 경제계는 10여 년 전부터 미국 국회에 ‘전문직 비자 쿼터(E-4 비자)’ 1만5000개를 만들어 달라는 내용을 담은 ‘한국 동반자법(Partner with Korea Act)’을 통과시켜 달라고 요구해 왔다. 정부는 미국 내 반이민 정서가 악화되면서 미국 의회 분위기상 ‘한국 동반자법’ 통과가 쉽지 않은 상황으로 파악하고 있다.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은 이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조현 외교부 장관을 향해 “전문직 취업비자(H1-B)를 확보하거나 한국인 전용 전문직 취업비자를 받아내는 등의 방법을 강구해야 할 텐데 외교부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고 계시냐”고 물었다. 이에 조 장관은 “지난번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대규모 투자 요청이 있었고 우리도 화답을 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선 비자 문제가 선결 과제라는 것을 미국 측에 강조하고 구체적인 협의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이날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에게 우리한테 투자를 (하라고) 하면서 이렇게 비자 문제를 보수적으로 보면 어떻게 하느냐는 이야기를 분명히 했다”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그런 부분에 대한 합리적인 방안을 찾으시겠다고 멘트한 것으로 보고받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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