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을 선출 권력보다 아래로 볼 때 나치즘이 시작됐다[송평인의 시사서평]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9월 21일 11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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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은 그저 헌법 조문을 읽는다고 이해되지 않는다. 법학 중에서 특히 헌법은 헌법 조문만이 아니라 헌법 조문을 둘러싼 이론을 잘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철수(작고) 같은 헌법 교과서의 저자들 못지 않게 김효전 같이 헌법 이론서들을 번역해 소개하는 데 공을 들인 분들은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김효전 교수가 번역한 많은 책 중에 ‘헌법의 수호자 논쟁’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카를 슈미트가 1929년 쓴 ‘헌법의 수호자(Der Hüter der Verfassung)‘라는 논문과 한스 켈젠이 1931년 쓴 ’누가 헌법의 수호자여야 하는가(Wer soll der Hüter der Verfassung sein)라는 논문을 모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이 나온 건 1991년인데 오늘날 변호사시험 준비 학원처럼 변한 로스쿨의 분위기에서 이런 류의 논문은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하는 탓인지 절판된 지 오래다. 지금이라도 읽으려고 한다면 단지 몇몇 도서관에서만 빌려서, 그것도 대출로는 불가하고 열람으로만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다시 읽은 것은 얼마전 이재명 대통령의 100일 기자회견에서의 발언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국가 권력에는 서열이 있다”면서 “선출 권력인 입법부의 서열이 행정부와 사법부보다 위”라고 했다. 이것은 사법부는 따질 필요도 없이 입법부와 행정부만 비교해봐도 틀린 말이다.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대다수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대통령이 수장인 행정부와 국회라는 입법부는 대등한 권력을 갖고 있으며 특히 오늘날의 프랑스나 과거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처럼 대통령이 의회 해산권을 가진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오히려 의회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

물론 이 대통령의 말은 자신이 수장인 행정부와 입법부의 권력 서열을 비교하기보다는 입법부와 사법부의 권력 서열을 비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입법부가 대통령인 자신보다 위에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입법부가 사법부보다 위에 있다고 말하기 위함이고 그럼으로써 결국 같은 선출 권력인 자신 또한 사법부보다 위에 있다고 말한 게 됐다.

헌법은 어느 나라나 거의 대부분은 입법부-행정부-사법부의 순으로 서술돼 있다. 이것은 입법부의 서열이 행정부나 사법부보다 앞서기 때문이 아니다. 법치국가의 운영 체제가 입법부가 법률을 만들면 행정부가 집행을 하고 사법부가 그 위반을 처벌하는 논리적 순서로 돼 있기 때문이다.

입법부가 만드는 것은 헌법이 아니라 법률일 뿐이다. 헌법은 입법부가 아니라 국민이 만든다. 그 국민이 의원도 뽑지만 대통령도 뽑는다. 그리고 사법부(오늘날 통상 헌법재판기능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사법부)는 국민이 만든 헌법에 법률이 일치하는지 여부를 따져 입법부가 만든 법률을 무효화시키기도 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삼권 분립이며 이런 의미의 삼권 분립 개념은 프랑스에서 18세기 몽테스키외에 의해 정식화되고 미국에서 19세기 존 마셜 연방대법원장 시절 완벽한 형태로 실현됐다.

독일어권에서 이 같은 삼권 분립의 개념을 명확히 한 사람이 1920년 세계 최초의 헌법재판소를 오스트리아에서 창설하고 직접 재판관을 역임하기도 한 켈젠이었다. 오스트리아 헌법재판소를 모델로 독일에서도 전후 헌법재판소가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도 1987년 헌법을 통해 헌법재판소가 실효적으로 도입됐다. 좀 뒤늦긴 했지만 독일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렇게 해서 삼권의 대등한 분립 관계가 비로소 형성됐다. 다시 말해 임명 권력이 선출 권력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슈미트는 국민의 결단, 즉 선출을 중시하는 학자였다. 그에게 진정한 권력은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과 의회였으며 그 중에서도 당파적 이해로 갈갈이 찢긴 의회보다는 중립적 관점에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대통령이 중심이었다. 바이마르 헌법의 문언(文言)상으로도 비상대권을 행사해 예외 상황을 다룰 수 있는 대통령이야말로 헌법의 수호자였던 것이다.

바이마르 헌법에는 헌법재판소가 없었다. 국사재판소가 헌법쟁송을 확대하고 있었지만 일반적인 헌법재판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법원이 위헌적 법률에 대해 구체적 사건에 그 적용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법원이 헌법의 수호자까지는 몰라도 헌법의 보장인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게 켈젠의 견해다. 슈미트는 구체적 사건에 대한 적용 거부를 넘어 위헌적 법률 자체를 폐지하는 기능을 가진 헌법재판소의 설치는 민주주의 원리와 모순된다고 주장했는데 사법의 헌법 수호 기능을 경시한 그의 이론은 결국 나치즘으로의 투항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켈젠은 민주주의적 법치국가에서는 대통령 의회 법원이 다같이 헌법의 수호자라고 봤다. 그에 따르면 사법적 기능과 정치적 기능간의 본질적 대립이 존재한다는 슈미트의 전제는 잘못됐다. 법관의 결정은 법률 중에 완전히 포함돼 있으며 단순히 논리적 조작의 방법으로 법률로부터 연역되는 데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는 사법 현실을 잘 모르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슈미트의 정의대로 정치적인 것을 이해 대립 사이의 결정으로 본다 해도 법관의 모든 판결에는 다소간의 결단의 요소, 즉 정치적 요소가 들어있다. 사법의 정치적 성격은 자유재량의 여지가 넓으면 넓을수록 강해진다. 사법은 법률 내용에 대한 의문 없이 사실만 갖고 다투지 않는다. 법률 내용에 의문이 생겨 다투는 경우도 그 못지않게 많다. 특히 헌법은 막연하기 때문에 그 내용에 대한 다툼이 많다. 그렇다면 헌법에 대한 판단은 독립된 재판소에 맡기는 것이 합목적적일 수 있다는 게 그가 오스트리아에서 헌법재판소 창설에 앞장 선 이유다.

켈젠에 따르면 입법만이 생산적인 법 창설이며 재판권은 단순히 재생산적인 법적용에 불과하다는 견해는 잘못이다. 입법의 정치적 성격과 사법의 정치적 성격은 단지 양적인 차이에 불과하고 질적인 차이는 없다. 그의 견해는 로널드 드워킨 등 현대적 헌법학자들의 견해를 한 세대 앞서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슈미트의 나치즘으로의 귀결은 사법부의 임명 권력을 대통령이 됐든 의회가 됐든 선출 권력보다 하위에 둘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비극적 사례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이 이 대통령의 ‘권력 서열’ 발언으로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대한민국 헌법을 한번 읽어보시라”는 자신의 발언은 이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굳이 불필요하게 해명하고 나선 것은 헌법재판소장 대행을 맡았던 사람답지 않다. 그 발언은 여의도의 민주당보다 먼저 이 대통령을 향해 했어야 한다.

문 전 재판관의 말대로 헌법 조문만 읽어서 삼권 분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법학이 아무리 빵을 위한 학문이라고 하지만 법의 기본 개념, 특히 헌법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려면 헌법 조문이나 헌법 교과서만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대통령이 변호사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대학 시절 사법시험 공부나 한 알량한 법학 지식으로 권력 서열 운운한 것은 삼권 분립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낸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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