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부는 일제강점기 민족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선열들의 뜻이 담긴 날이자 본격적인 국어운동의 출발을 알린 ‘한글날 제정’을 2025년 10월의 독립운동으로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
한글날은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기 위해 1926년 ‘가갸날’로 제정된 후 1928년 한글날로 이름이 변경됐고, 1940년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돼 훈민정음 완성 시기(1446년 음력 9월)가 확인됨에 따라 1945년 해방 이후 10월 9일로 확정됐다.
1896년 독립신문은 사설을 통해 “한문보다 백배가 낫고 편리한즉 내 나라에 좋은 게 있으면 그것을 쓰는 것이 옳다”라고 강조하며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글을 국문으로 삼는 것이 근대 개혁의 상징적 조치가 되면서, 한글은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구심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한글처럼 우수한 문자를 만든 민족으로서 한글과 우리말을 부흥시키고, 이를 통해 민족과 국가의 번영을 이끌겠다는 논리가 확인됐던 것이다.
이후 한글 창제 기념일을 정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고, 주시경의 제자들이 결성한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 전신)는 1924년 2월 1일 ‘한글 창제 기념식’을 치렀다. 또한 1926년 11월 4일 열린 ‘한글 반포 기념식’은 대규모로 열려 일제강점기 우리말 운동이 대중화되는 전환점이 됐다.
일제의 방해와 탄압에도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 결성과 조선어사전 편찬, 1933년 ‘한글마춤법통일안’, 1936년 ‘조선어표준말모음’의 발표가 있었다. 일제는 1936년 ‘표준어사정안’ 발표회를 마지막으로 조선어학회가 주최하는 모든 집회를 금지해 1937년 이후 한글날 기념식은 열리지 못했다.
중일전쟁과 함께 시작된 전시체제기에는 조선어학회의 이윤재, 최현배 등이 독립운동을 이유로 옥고를 치렀다. 조선어학회는 위기 속에서도 1942년 해체되기 전까지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지속했다. 우리 말과 글을 지켜 민족을 지켜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훈부는 “한글날은 단순히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선조들의 뜻이 담긴 날”이라며 “한글은 그 자체로 과학적이고 우수한 문자이지만, 동시에 민족적 자부심의 상징이었다”라고 설명했다.
보훈부는 이달의 독립운동을 선정하기 위해 1개월간 국민의 추천을 받았다. 국민이 추천한 10월의 독립운동은 한글날 제정 외에도 유학생 단체 학우회 창립, 대한광복군정부 성립, 법정사 항일운동, 청산리 대첩, 임시의정원 건국기원절 결의, 조선의용대 창설 등이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