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시도자 찾아가고, 전화상담사 늘려야 ‘OECD 1위’ 오명 벗는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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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 작년 자살 사망자 1만4439명… 13년 만에 최다
21년 전부터 ‘예방 5개년 계획’ 시행… 실제 현장에선 제대로 집행 안 돼
‘자살 시도자’ 집중 관리 서비스… 대만-日은 직접 집에 찾아가 상담
韓, 문자로 ‘서비스 받겠냐’ 연락… 작년엔 상담 전화번호 ‘109’로 통합
인력-처우난에 응답률 이전과 비슷… 美는 번호 통합 후 예산 대폭 배정
정부 주도 예방센터 운영엔 한계… NGO 등 민간과 적극 협력할 때
“죽지 않을 권리, 사회가 보장해야”

지난해 국내에서는 하루 평균 39.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시간에 1.6명꼴이다. 모두 1만4439명이 세상을 떠났다. 2011년 이후 13년 만에 가장 많았다. 한국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라는 사실은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을 정도다.

자살은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요인이 얽힌 복합적인 문제다. 낮은 경제성장률과 심화되는 양극화와 불평등, 무한 경쟁과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문화까지…. 그렇다면 자살률은 이 모든 사회적 문제가 해결될 때 비로소 감소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자살은 복잡한 문제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결할 수 없는 ‘답 없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효과적인 자살 예방 정책을 추진해 자살률을 낮춘 여러 해외 국가들의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자살 예방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해봤는지 짚어봤다.

● 자살 예방 정책은 ‘세계 최고 수준’… 하지만 실상은

“해외에 나가서 한국의 자살 예방 정책에 대해 소개하면 전문가들이 ‘대단하다’라면서 박수를 칩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저는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정책이 존재하는 것과 그 정책이 실제로 작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지난해 미국에서 관계 부처 합동으로 ‘자살 예방 국가 전략’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한국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국내 정책을 참고해서 만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문제는 국내에서는 그 좋은 정책들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는 겁니다.”(전진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사회정신건강연구센터장)

국내에서 자살 예방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건 21년 전이다. 2004년 제1차 국가자살예방 5개년 기본계획이 그 시작이다. 이후 자살에 대한 국가적 책임을 규정한 자살예방법이 2011년 만들어졌고 2018년 보건복지부에 자살 예방 정책을 담당하는 부서(과)가 신설됐다. 20여 년 동안 국내 자살 예방 정책은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해외 선진국들 못지않게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백 교수와 전 센터장의 말처럼 문제는 실제로 현장에서 이 정책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 자살 시도자 직접 찾아가는 대만-일본

대표적인 게 자살 시도자에 대한 관리다. 자살을 시도한 이들은 자살 고위험군이기 때문에 시도 직후 전문가의 선제적인 개입이 필수다. 2022년 자살예방법이 개정되면서 경찰과 소방은 자살 시도자를 발견하면 ‘당사자의 동의가 없어도’ 의무적으로 자살 시도자의 이름과 연락처 등의 정보를 자살예방센터와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제공해야 한다. 센터에서 상담이나 치료, 필요한 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복지부에 따르면 센터로 의뢰된 자살 시도자 중 실제 센터의 도움을 받는 이들의 비율은 2023년 기준 약 33%에 불과하다. 백 교수는 “센터에서 보통 자살 시도자에게 연락할 때 ‘서비스를 받겠냐’는 내용의 문자를 보낸다”며 “자살을 시도한 이후 대뜸 모르는 사람이 보낸 문자를 보고 선뜻 도움을 받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설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말했다. 백 교수는 이어 “몇몇 열정 있는 센터 직원들이 직접 자살 시도자를 방문해 서비스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지만 극히 일부”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비슷한 정책을 시행하는 해외는 사정이 어떨까. 대만은 센터가 경찰을 통해 자살 시도자 등 고위험군에 대한 정보를 접하면 일주일 내에 집으로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들어준다. 일본도 지자체 공무원이 직접 방문해 자살 시도자의 스트레스 요인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지자체 담당 부서와 연결해줘 필요한 도움을 받게 해준다. 여러 국가들이 비슷한 정책을 도입했지만 실제 현장에서 작동하는 방식에는 큰 차이를 보였다.

● 자살 상담 전화 개편하며 대대적 투자한 미국

자살 상담 전화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지난해 여러 개로 흩어졌던 상담 전화번호를 ‘109’라는 하나의 번호로 통합했다. 당시 전문가들로부터 상담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이 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7월 109의 응답률은 57.9%로 번호 통합 전인 2023년(53.7%)과 비슷했다. 2022년(60.1%)보다는 오히려 더 떨어졌다. 자살 예방을 담당하는 복지부 산하기관인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관계자는 “번호 통합 후에 상담 수요는 늘었는데 상담사 인력난과 처우 개선 문제가 아직 명확히 해결되지 않아 늘어난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미국도 2022년 자살 상담 전화를 개편했다. 미국은 이전까지 자살 상담 전화가 열 자리였는데 직관적으로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911과 비슷한 ‘988’이라는 번호로 통합했다. 이때 미국은 연방정부와 주정부 차원에서 상담 인력 보강을 위해 예산을 배정하는 등 대폭 투자했다. 같은 정책을 도입하고도 차이가 생기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이윤호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예산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다면 자살률은 계속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다”며 “자살 예방 정책을 우선순위에 두고 더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처장은 이어 “자살 예방 정책의 예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기금을 활용하는 등 새로운 방안을 적극적으로 고민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 “자살 예방 활동하는 민간과 적극 협력해야”

전문가들은 정부와 공공기관이 자살 예방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민간기관과 협력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 센터장은 “공공이 주도해서 계속 별도 센터를 만들고 인력을 투입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며 “이미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비정부기구(NGO)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 센터장은 “호주와 영국은 자살 예방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NGO들이 경쟁해서 정부 예산을 따내고 정부가 NGO의 프로그램을 모니터링하면서 국민들이 효과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관리한다”고 설명했다.

일본도 자살 예방에서 민간의 영역이 활발한 대표적인 국가 중 하나다. 이 처장은 위기 청소년을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민간단체인 ‘본드 프로젝트(Bond Project)’를 방문한 경험을 떠올렸다. 이 처장은 “약 10명의 자원봉사자가 노트북 앞에 앉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자살을 하고 싶다’고 글을 올린 청소년을 찾는 작업을 하고 직접 도움을 주기 위해 방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며 “정부와 지자체가 민간단체의 활동을 지원하는 체계가 자리를 잘 잡았다”고 말했다. 공공의 손길이 닿을 수 없는 빈틈을 민간을 활용해 적절히 채우고 있는 것이다.

● “‘죽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의 권리”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불안해지고 우울해진다.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도 든다. 그래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자신도 모르게 자살 문제를 외면하고 싶은 건 이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정치인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지지와 관심도 간절하다고 강조했다. 어쩌면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라는 충격적인 수치에 익숙하다 못해 무뎌진 것은 아닌지 스스로 질문해볼 필요도 있다는 얘기다.

“자살은 오랫동안 아프고 힘들었던 사람만 겪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겪는 고통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이 죽음밖에 없다는 생각에 빠져서 주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보장해야 할 하나의 권리입니다. 자살 예방에 대한 관심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백 교수)

※우울증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가족이나 지인이 있을 때 자살예방 상담전화(☎109)나 자살예방 SNS 상담 ‘마들랜’(마음을 들어주는 랜선친구)으로 연락하면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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