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고문에 ‘거짓 자백’한 청년…사법부는 43년 만에야 고개를 숙였다[법조 Zoom In : 법정시그널]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5월 31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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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 사건 어떻게 됐더라?” 할 때 정작 결말을 모르는 경우가 있지 않으셨나요? 사건은 ‘수사기관의 수사나 당사자의 소 제기’로 시작되지만, 결국 ‘법원의 판결’로서 끝이 납니다. 사건의 시작과 끝 사이, 법정에선 치열한 사실관계와 법리 다툼이 벌어지고 이 내용이 판결문에 기록됩니다. 법정의 가장 앞자리, 1열에서 사건의 디테일과 결말을 전해드립니다.
1982년 봄, 서울 남산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지하 3층. 창문 하나 없어 낮인지 밤인지도 모른 채 김동현 씨(68)는 팔과 다리가 막대기에 묶여 공중에 띄워져 있었습니다. 김 씨의 당시 나이는 25세. 물수건으로 덮인 얼굴에 주전자로 계속 물을 들이붓자 그는 결국 기절했습니다. 당시 안기부 수사관들은 이 고문을 ‘통닭구이’라고 불렀습니다.

“너는 진짜 악질이네. 조서에 추가해라.”

고문을 견디다 못한 김 씨가 극단 선택을 시도하자 수사관은 오히려 ‘북한의 지령에 따라 자살하려 했다’며 조서를 조작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내용은 고스란히 공소장에 담겼고 김 씨는 징역 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43년 뒤인 2025년 5월 21일. 김 씨의 재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4-2부 재판장 권혁중 부장판사는 사과의 말을 했습니다.

“피고인은 안기부 조사 동안 구타와 가혹행위에 자살 시도를 할 정도로 심리적 위축 상태였습니다. 다시 안기부로 불려 가 고문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허위 자백했을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선배 법관들의 잘못에 대해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고문으로 인해 헤드셋 없이는 재판장의 말을 들을 수 없었던 김 씨는 43년 만에 들려온 사과에 조용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서울고등법원 법정 내부 모습.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공포심에 재판서 ‘허위자백 강요’ 진술했지만 무시 당해
성균관대 학생이었던 김 씨는 광주5·18민주화운동을 접하고 자작 시집을 내는 등 학생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안기부의 ‘대학생 불온 조직’ 수사를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을 시도하며 국제사면위원회에 5·18의 실상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귀국 직후 김포공항에서 곧장 안기부로 끌려가 40일간 불법 구금돼 안기부가 원하는 ‘스토리’를 읊을 때까지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김 씨는 ‘남조선의 부당성을 외신 기자들에게 고발하고 김일성 주석이 보장하는 평생 특혜를 받기로 했다’ ‘1967년 동백림(東伯林·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관계자와 접촉했다’와 같은 허위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돼 버려. 고문받을 땐 발가벗겨지고 완전히 고깃덩어리가 돼. 인간이 파괴돼. 수사관들은 인간을 세뇌하는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야.”

김 씨는 1심 재판에서 ‘검사로부터 허위 자백을 강요받거나 고문받은 사실이 있느냐’는 질문에 “검사실로 안기부 수사관이 찾아와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고 진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982년 김 씨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한 서울형사지법의 1심 판결문은 총 38쪽입니다. 그중 34쪽은 허위 자백을 통해 만들어진 김 씨에 대한 허위 범죄사실로 가득 차 있습니다. 1심 재판부는 “반국가 단체 지령에 따라 범행을 저지르기로 한 방편으로 자수를 해 면제 사유로 보기도 어렵다”며 감형 가능성까지 배제했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고문 경찰관 5명에 대한 서울형사지법 결심공판에서 검찰의 구형량에 불만을 품은 방청객들이 의자 등을 던지며 격렬한 항의 소동을 벌여 법정이 수라장이 된 모습. 동아일보 DB


● 피고인 호소 세 차례나 외면한 사법부
사법부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던 김 씨는 ‘불법 구속으로 인한 임의성 없는 자백’이라고 뒤늦게라도 주장하며 항소했습니다. 그러나 항소심은 ‘범죄사실을 인정하기에 증거가 넉넉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대학을 나왔고 외국 여행까지 했기 때문에 검찰에서의 자백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피고인이 원심공판정에서 피의자 신문조서 작성 시 검사로부터 고문받은 사실이 없다고 진술했다”고 했습니다.

인권 수호의 ‘최후의 보루’라고 불리는 대법원의 판단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대법원은 1983년 7월 26일 판결문에서 “피고인의 자백에 임의성이 없다고 인정할 만한 아무런 자료가 없다” “북괴 공관원과 회합·연락하면서 반국가단체인 북괴를 찬양·동조했다는 피고인의 자백을 뒷받침할 자료가 충분하다”고 판시했습니다.

피고인이 세 차례나 억울함을 호소했음에도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은 것입니다.

이후 김 씨는 5년 형기를 마친 뒤 출소했고, ‘특별요시(要視)’ 대상자로 지정돼 경찰의 감시하에 살아야 했습니다. 간첩으로 낙인찍힌 그는 결국 일본으로 이주해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검찰은 29일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습니다. 무죄가 확정된 김 씨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내가 주장하고 싶은 건 인간의 양심입니다. 아주 정의로운 판단을 해주신 판사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번에는 검사도 재판부 판결을 존중한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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