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장수가 트레일레이스의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그 배경에는 5년 전 장수로 귀촌한 김영록 대표의 진심과 땀이 있다. 사진은 올해 5월 열린 장수 트레일투어 프로그램의 한 참가자가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김영록 대표 제공
산악마라톤(트레일러닝)은 달리기와 등산이 결합된 스포츠다. 국내외 다양한 산지에서 크고 작은 대회가 열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 ‘UTMB(The Ultra-Trail du Mont-Blanc race)’로 불리는 울트라 트레일 몽블랑 레이스. 프랑스 샤모니를 출발, 이탈리아 스위스에 이르는 최장 176㎞ 코스의 대회다.
올가을 국내에서도 UTMB에 버금가는 트레일레이스가 전북 장수군에서 펼쳐진다. 길이가 173㎞에 이른다. 국내 최장거리 트레일러닝 코스다. 이 코스를 만들고 대회를 개최하는 이가 바로 락앤런(ROCKNRUN)의 김영록 대표(33)다.
경기 시흥시 출신인 김 대표는 2020년 말 장수에 내려왔다. 그저 달리기를 좋아했던 한 청년은 이제 국내에서 손꼽히는 트레일레이스의 운영자로 살고 있다. 올해는 행정안전부의 청년마을 지원사업 대상에 선정돼 장수를 ‘트레일빌리지’로 만들어갈 꿈을 실현해가고 있다.
장수 트레일레이스 결승선에 김영록 대표와 부인 박하영 씨가 나란히 서 있다. 장수가 고향인 박 씨는 귀촌한 김 대표와 함께 트레일레이스를 운영하고 있다. 김영록 대표 제공 김 대표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시간날 때마다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 농구 등을 즐겼다. 자연스럽게 달리기도 몸에 배었다. 해병대 전역 직후인 2013년 9월 서울 수복기념 마라톤 풀코스에 처음 참가했다. 기록은 4시간 19분.
“완주는 했지만 두 번은 못 뛰겠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힘들어서요.”
마음이 바뀐 건 이듬해 오토바이를 타다 큰 사고가 났을 때다. 한 달가량 병상에 있으며 그는 ‘하고 싶은 걸 다 해보자’라고 결심했다. 퇴원 후 국토대장정에 참가하고 제주 한라산 트레일러닝 대회 100㎞ 코스도 뛰었다.
“일반 로드마라톤과는 느낌이 달랐어요. 한라산의 풍경을 보면서 달리는 게 너무 좋고 행복했습니다.”
제주에서 만난 다른 참가자들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대회 정보를 알게 됐다. 김 대표는 아예 학교를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등으로 돈을 모아 아프리카 나미비아 사막, 중국 고비 사막, 칠레 아타카마 사막 등에서 열리는 극한의 오지 마라톤을 다녀왔다.
그렇게 달리기를 계속하다 학교에 복학했다. 졸업 후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을 통해 호주로 갔다. 끝나면 호주에서 학업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그때 현지에서 만난 사람이 지금의 아내 박하영 씨(28)다.
함께 의지하며 살던 두 사람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이 일어났다. 장수에 있는 박 씨의 고향집에 불이 난 것이다. 가족들은 무사했지만 박 씨는 더 이상 호주에 머물 수 없었다. 김 대표는 “함께 돌아가겠다”고 했다. 박 씨가 “한국에서 계속 당신을 만날지 안만날지 모른다”고 했지만 그는 고집을 꺽지 않았다.
2020년 2월 두 사람은 한국에 돌아와 서울의 작은 방을 얻었다. 김 대표는 서울과 장수를 수시로 오가며 박 씨 가족의 새 보금자리 마련을 돕고 농사와 목장 일을 거들었다. 그렇게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결혼도 안 한 채 수개월이 지났다. 결국 같은 해 12월 두 사람은 귀촌을 결정했다.
장수 트레일레이스 코스에서 바라본 전경. ‘코스가 개성있고 아름답다’는 소문이 나면서 다양한 국가에서 온 외국인 참가자도 늘고 있다. 김영록 대표 제공 김 대표는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다. 장수가 낯설 수밖에 없었다.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외로움을 피할 수 없었다. 힘들게 들어간 직장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몇 달 만에 그만두는 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로움의 진짜 원인은 불안감이었어요. 뭘 하며 살아가야 할지도 몰랐고. 지역을 모르니까 은연 중 사람들로부터 무시받는 일도 있었고요.”
김 대표는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았다. 호프집 서빙이나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체육회에서 스포츠 지도사로도 일했다. 전공(전자공학)을 살려 어르신이나 학생을 대상으로 컴퓨터나 스마트폰 강의도 했다.
“무주나 순창, 진안까지 가서 강의를 했어요. 그만큼 수요는 있는데 지역에선 강사조차 구하기가 어려운 거죠.”
여러 일을 하면서도 답답함을 떨칠 수 없었다. 그 때마다 김 대표는 산에 올랐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해발 1237m의 장안산을 뛰었다.
“트레일러닝 대회를 만들고 싶다는 게 오랜 꿈이었어요. 힘들 때마다 산을 뛰면서 그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김 대표는 장수 주민들을 대상으로 러닝크루를 만들었다. 1년간 주민들과 함께 산을 달렸다. 박 씨와 함께 어린이마라톤 같은 행사도 치렀다. 그러면서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마침내 2022년 제1회 장수트레일레이스가 열렸다. 김 대표가 직접 뛰어다니며 만든 38㎞ 길이의 코스였다. 참가자는 180여 명. 대부분 김 대표가 달리기를 하며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전국 곳곳을 돌며 “장수에 새로운 트레일 코스를 만들었다. 꼭 한번 와달라.”고 하자 기꺼이 참가한 것이다.
“만약 20대 때 그렇게 달리기를 하지 않았다면 아마 첫 대회 때 10명도 안왔을 거에요. 도전하고 싶으면 도전하고, 쉬고 싶으면 쉬고, 여행가고 싶으면 가고…그냥 가만히 있지 않고 뭐라도 해본 것들이 모두 자산이 된 것 같아요.”
장수 트레일레이스 참가자들이 코스 중간에 마련된 보급소(CP)에서 물과 간식을 먹고 있다. 대회가 열리면 장수 주민들은 주먹밥과 떡 같은 간식을 만들어 제공한다. 김영록 대표 제공 장수 인구는 2만 명 남짓이다. 그리고 전체 면적의 75%가 산으로 이뤄졌다. 한우나 사과가 유명하지만 별다른 볼거리, 즐길거리가 없다.
“저도 처음에 장수하니까 딱 떠오르는 게 없었어요. 그런데 잘하면 트레일이 그 역할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김 대표가 개최한 1회 대회를 지켜본 장수군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김 대표와 장수군은 고립과 단절의 의미가 컸던 장수의 산악자원을 적극 활용하기로 했다. 전문 러너뿐 아니라 초보자도 참가할 수 있도록 다양한 코스를 개발했다. 덕분에 2회 대회에는 참가 선수가 700여 명으로 껑충 뛰었다. 2024년에는 횟수를 연간 2회로 늘렸다. 합쳐서 3000명 가까운 선수가 참가했다. 올해 초 열린 5회 대회에는 2500여 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진행을 돕는 스태프를 포함하면 당일치기를 제외하고 1박 2일로 오는 사람이 2000명이 넘어요. 몇 개 없는 숙박업소가 다 차고 연수원, 체육관, 캠핑장까지 빌려야 합니다.”
대회 기간 중에는 장수의 분위기도 들썩인다. 주민들은 자원봉사자로 대회 진행을 돕고, 선수들이 보급소(CP)에서 먹을 주먹밥과 떡 등을 함께 만들어 제공한다. 코스 곳곳에서 응원전도 펼친다.
‘트레일레이스 코스가 개성 있고 풍경도 아름답다’는 소문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퍼지면서 미국 일본 중국 프랑스 나이지리아 등 다양한 외국인 선수도 참가하고 있다. 9월 하순에는 6회 대회가 열린다. 처음으로 100마일 코스(실제 길이는 173㎞)가 신설됐다. 국내 트레일레이스 코스 중 가장 길다.
“트레일러닝을 위해 해외에 나갈 필요 있냐, 장수로 와라…그렇게 만들고 싶어요. 그렇게 장수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달리면서 더 건강해지고, 제가 느꼈던 성취감과 몰입감 그 이상으로 더 많은 걸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김영록 대표가 장수 트레일빌리지 간판 앞에서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김 대표는 장수군과 손잡고 장수를 트레일의 성지, ‘트레일빌리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워 2025년 행정안전부 청년마을 지원사업 대상에 선정됐다. 장수=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김 대표는 올해 초 락앤런을 설립했다. 장수 트레일레이스를 주관하는 법인이다. 그리고 트레일레이스를 활용해 행정안전부의 2025년 청년마을 지원사업 대상에 선정됐다.
“장수를 트레일빌리지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트레일의 성지요. ‘임실 치즈’, ‘양양 서핑’처럼 장수하면 트레일이 그냥 떠오르게 지역 브랜딩을 만들고 싶어요.”
아직 갈 길은 멀다. 장수군 인구는 2만 명을 조금 웃도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김 대표도 직원을 구할 때마다 마땅한 사람이 없어 애를 먹었다. 그래도 장수를 바꿀 수 있다는 꿈을 조금씩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다.
“지금도 대회가 열리면 300명 가까운 스태프가 내려옵니다. 50명가량은 장수 청년들이에요. 그 청년들이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곳을 방문한 청년 중에서도 정착하는 사람이 있을 거고요. 저희 직원 한 명은 트레일레이스 덕분에 장수에 아예 내려왔습니다. 앞으로 그렇게 3년간 30명까지 트레일을 통해 귀촌하게 하는 게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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