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 “트로피보다 패밀리” 세계 1위의 또다른 선택
셰플러 “골프가 인생의 전부일 순 없어… 가정에 영향 미치게 된다면 그만둘 것”
‘NFL 전설’ 브레이디, 아빠-선수 양립 주장… “더 나아지려는 자세, 아이들이 보고 배워”
‘수영 황제’도 시행착오 거치며 균형 찾아… 펠프스 “아빠는 수영장보다 네 옆이 좋아”
남자 골프 세계랭킹 1위 스코티 셰플러(왼쪽)가 지난달 미국프로골프(PGA)투어 디 오픈 챔피언십 우승을 확정한 뒤 아들 베넷을 포옹하고 있다. 지난해 5월 태어난 베넷은 이날 시상식 때 맨발로 필드에 기어와 아빠와 함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셰플러는 이 대회 개막 기자회견에서 “우승이 인생의 모든 기쁨을 주지는 못한다”며 “내게 골프는 늘 가족 다음”이라고 말했다. 포트러시=AP 뉴시스
《“기필코 우승하겠다.”
대부분의 스포츠 스타들은 큰 대회를 앞두고 으레 이렇게 말한다. 적어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이야기 정도는 한다. 자기 암시만이 아니다. 팬들과 스폰서가 기대하는 ‘세계 1등’은 승리를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는 ‘신화적 존재’다. 대중이 보기에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불가능,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게 이들의 화법이고, 그 장면이 곧 브랜드다.
그런데 남자 골프 세계 1위 스코티 셰플러(29·미국)는 지난달 정반대 메시지를 던졌다. 남자 프로 골프 최고(最古) 대회 디 오픈(The Open) 개막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 때였다. 셰플러는 우승 각오를 묻고 듣는 자리에서 인생에 대한 고뇌를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그러고는 취재진을 향해 이렇게 되물었다. “우승이 도대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나?”》
● 세계 1위라는 직업
우승과 인연이 없는 선수가 이렇게 말하면 ‘여우의 신포도’ 타령처럼 들릴 수 있겠다. 하지만 셰플러는 디 오픈에서 우승하며 최근 3년간 네 번째 메이저대회 정상을 차지했다. 최근 2년간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서 11번이나 우승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50·미국)의 전성기를 보는 것 같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디 오픈 우승 후에도 셰플러의 인생관에는 변함이 없었다. 셰플러는 “만족스러운 성취지만 우승한다고 인생의 모든 게 채워지는 건 아니다”라며 “나도 ‘내가 왜 이렇게 우승을 바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고 고백했다.
셰플러는 “프로 스포츠 선수로 사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도 했다. “우승을 위해 그렇게 평생의 노력을 쏟고 열심히 하는데 정작 우승의 기쁨은 몇 분이면 다 사라진다. 그런데도 그 잠깐의 순간을 위해 정말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세 살 때 골프채 장난감을 선물받고 프로 골프 선수를 꿈꾼 셰플러는 세계 최고의 골퍼가 된 요즘 “골프를 업(業)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다는 건 큰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골프가 인생에서 가장 갈망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라고 답할 거다. 골프가 가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그날로 그만둘 것”이라고 말했다.
골프가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셰플러는 “훌륭한 골퍼가 되는 것보다 좋은 아빠가 되는 게 더 중요하다”고도 했다.
셰플러는 또 “내가 이번 대회에서 2위를 하든, 꼴찌를 하든, 어떤 일이 생기든, 우리는 늘 ‘다음 주’(대회)로 넘어간다. 그게 골프의 묘미이자 동시에 짜증 나는 점”이라면서 “아무리 대단한 성취를 이룬다 해도 마찬가지다. 또 다음 대회를 준비해야 하는 건 같다. 우승하면 가족들과 껴안고 축하하며 그 순간을 만끽할 순 있다. 그러고 나면 결국 ‘오늘 저녁엔 뭘 먹지?’ 하는 고민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고 했다.
● 우승은 짧고 인생은 길다
셰플러는 디 오픈 우승 상금으로 310만 달러(약 42억7500만 원)를 받았다. 셰플러에게 4타 뒤진 2위 해리스 잉글리시(36·미국)가 받은 상금은 60%도 되지 않는 175만9000달러(약 24억2566만 원)였다. 1타 차이에 33만5250달러(약 4억6265만 원)가 오간 것이다. 프로 스포츠는 성과 차이보다 보상 차이가 훨씬 큰 ‘슈퍼스타 경제학’이 지배하는 세계다.
이 때문에 프로 스포츠 선수는 ‘세계 2위’를 해도 좌절감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세계 1위에만 머물 수도 없다. 셰플러가 말한 것처럼 프로 골프 투어에서는 매주 새로운 챔피언이 탄생한다. 디펜딩 챔피언의 유효 기간이 가장 긴 올림픽이라고 해도 4년이 최대다.
이런 분야에서 세계 최고 자리를 지키는 셰플러가 ‘우승의 의미를 모르겠다’고 하는 게 우승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이 지켜야 하는 건 우승 트로피가 주는 몇 분 동안의 기쁨이 아니라 결과에 상관없이 자신의 옆에 계속 남아 있을 가족과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번 주에 남들보다 타수 좀 적게 쳤다고 우쭐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그는 ‘셀럽’이 된 지금도 ‘미국의 김밥천국’으로 통하는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치포틀레 멕시칸 그릴’을 즐겨 찾는다. 셰플러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가던 가게는 이제는 (얼굴이 알려져서) 가기 힘들어졌다. 그런데 가까운 동네에 치포틀레 지점이 하나 더 있다. 어딘지 알려드리지는 않을 거다. 거기에서는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며 웃었다.
1억 달러(약 1378억 원)에 육박하는 통산 우승 상금도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바꿔놓지 못했다. 프로 골프 선수를 꿈꾸던 학창 시절에도, 세계 1위가 된 지금도 그는 똑같이 치포틀레를 좋아하는 텍사스 사나이일 뿐이다.
● “좋은 선수가 곧 좋은 아빠”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다면 좋은 선수가 되는 걸 포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니다.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 역사상 최고의 쿼터백으로 평가받는 톰 브레이디(48)가 그렇다. 브레이디는 NFL 챔피언결정전인 슈퍼볼 정상에 7번 오른 뒤 2023년 은퇴했다. NFL 역사상 브레이디보다 우승을 많이 한 선수는 물론이고 팀도 없다. 브레이디는 셰플러의 발언이 화제가 된 뒤 “좋은 아빠와 좋은 골퍼가 꼭 양자택일의 관계인 건 아니다”라고 자신의 뉴스레터를 통해 밝혔다.
“꼭 머리맡에서 동화책을 읽어주고 숙제를 도와줘야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삶의 모든 면에서 어떻게 하는지를 다 지켜본다. 물론 좋은 선수가 된다고 꼭 좋은 아빠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매일 더 나아지고, 더 나은 본보기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은 아빠가 되는 길이다.”
세계 최정상을 다투는 이들의 기준에서 ‘좋은’ 선수는 좋음(goodness)의 수준을 넘어 위대함(greatness)의 경지에 이른 존재다. 헌신의 수준이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을 사랑해야 이 정도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브레이디 역시 이를 모르지 않는다. 브레이디는 “탁월함을 좇으면서 내가 느꼈던 가장 큰 기쁨은 성취나 결과보다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브레이디는 선수 시절 ‘슈퍼볼 반지 중 어떤 걸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늘 “다음에 받을 반지”라고 답했다.
다만 골프 때문에 아내와 갈등이 생기면 그날 바로 골프를 그만두겠다는 셰플러와 달리 브레이디는 슈퍼모델 출신의 지젤 번천(45)과 2022년 이혼했다. 브레이디가 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더 이루겠다는 것이냐?’며 반대한 번천과 갈등이 생겼다.
번천은 이혼 후 자신의 주짓수 강사였던 조아킹 발렌치(37)와 교제를 시작했고 둘 사이에서 아들도 태어났다. 번천의 임신 소식이 언론 보도로 알려진 뒤 브레이디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도전에는 실수와 부족함이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싸우는 자는 대의에 자신의 열정과 헌신을 바친다. 이들은 마침내 위대한 성취의 영광을 맛본다. 최악의 경우에도 크게 도전했다가 실패한다. 그래서 그는 승리도 패배도 모르는 차갑고 겁많은 영혼과 결코 자리를 함께하지 않는다.”
● ‘선수가 아닌 나’
반대로 스포츠 선수 가운데는 승리와 패배밖에 모르는 게 문제인 케이스가 적지 않다. 스포츠 선수는 커리어의 성공을 자아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아 절정의 승리를 거둔 뒤에도 자신을 계속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일이 흔하다. 올림픽 역사상 가장 많은 금메달(23개)을 따낸 ‘아쿠아맨’ 마이크 펠프스(40·미국)가 그랬다.
펠프스는 15세이던 2000년 미국 남자 수영 최연소 국가대표로 시드니 올림픽에 나섰다. 결과는 빈손이었다. 펠프스는 이후 올림픽 메달을 목표로 1년 365일 휴식 없이 훈련했다. 펠프스는 “훈련을 하루 쉬면 다시 이전 상태로 몸을 끌어올리는 데 이틀이 걸렸다. 그 시간이 아까웠다”면서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며칠인지도 모르고 그냥 수영만 했다”고 말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금 6개, 동메달 2개를 따낸 펠프스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는 메달 8개를 전부 금빛으로 바꿨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때도 금 4개, 은메달 2개를 차지했다.
그러나 올림픽이 끝나면 우울증이 찾아왔다. 금메달이 준 짧은 희열이 지나고 나면 ‘또 4년을 어떻게 기다리지?’ 하는 허무함만 남았다. 훈련에 지친 펠프스는 2012년 런던 올림픽을 마친 뒤 은퇴를 선언했다.
“오랫동안 나를 인간이 아니라 수영 선수로만 여겼다”던 펠프스는 2014년 은퇴를 번복했다. 그는 “수영 선수가 아닌 인간으로서 나 자신을 좋아할 수 있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정말 나답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었다”고 했다.
복귀 후 펠프스는 메달이라는 목적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드는 과정에 집중했다. 그렇다고 메달이 도망가지는 않았다. 펠프스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때도 금 5개, 은메달 1개를 따냈다. 펠프스는 “여전히 때로 우울증 약을 먹고 불안에도 시달린다. 아마 평생 그럴 거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나”라고 말한다.
펠프스는 리우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다시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너무 이르다”고 했다. 펠프스는 고개를 저었다. 첫아들 부머(9)를 얻고 100일도 지나기 전에 리우 올림픽에 나섰던 펠프스는 “아이가 너무 빨리 자란다. (올림픽 후) 3, 4주 만에 아이를 봤는데 날 보면서 계속 웃는 모습에 눈물이 났다”며 “남은 시간은 ‘전업 아빠’로 보낼 것”이라고 했다.
펠프스는 현재 아들 넷을 키운다. 은퇴를 한번 번복했기에 펠프스는 여전히 ‘복귀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펠프스는 그럴 때면 지난해 파리 올림픽 미국 대표 선발전 중계를 함께 보던 셋째 아들 매버릭(5)과 나눈 대화를 전한다.
“매버릭이 ‘아빠, 지금도 저 선수들 이길 수 있어?’라고 묻더라. 그래서 ‘마음먹으면 할 수는 있는데 그러려면 아빠는 계속 수영장에 있어야 해. 학교에도 못 데려다주고 저녁도 못 해줘. 아예 같이 먹지도 못해’라고 했더니 ‘그러면 싫다’더라. 그래서 ‘아빠도 싫다’고 했다.”
꼭 천문학적인 돈을 번 스포츠 스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소셜미디어에는 이런 글도 유행이다. “20년 뒤에도 여러분의 야근과 주말 근무를 기억할 사람은 여러분의 아이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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