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 등촌역 인근에서 폭우 속 맨홀 작업자가 흙탕물에 휩쓸려 1.4km 떨어진 빗물펌프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집중호우 시 맨홀 사고 위험이 커 보행자 안전 수칙이 요구된다. 사진은 작업자 사망 사고가 일어난 강서구 염창동의 한 맨홀. 2025.08.25/소방 제공
25일 오전 8시 30분, 서울 강서구 등촌역 인근 도로에 폭우가 쏟아졌다. 출근길 시민들이 우산을 부여잡고 있을 때, “사람이 휩쓸려갔다!”는 다급한 외침이 빗줄기 속을 갈랐다.
검은 입을 벌린 맨홀이 순식간에 ‘죽음의 구멍’으로 변했고, 하수관 보수 작업 중이던 인부 A 씨가 거센 흙탕물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동료들이 몸을 맨홀 속으로 넣어 “대답 좀 해!”라고 부르짖었지만, 빗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 4분 만에 구조대 도착했지만 흔적 없어
동료들의 신고는 오전 8시 38분 접수됐다. 강서소방서 구조대와 경찰은 약 4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으나 A 씨는 이미 물길을 따라 사라진 뒤였다. 구조대는 8시 42분경 한강 방향 300m 지점 맨홀을 열어 확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소방 관계자는 “출동 당시 맨홀이 열려 있었고, 작업 중이던 인부가 총 5명이었다”며 “강한 물살에 휩쓸린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사고 장소 인근 119 구조대가 투입된 맨홀. 박태근 기자 ptk@donga.com 김수연 기자 xunnio410@donga.com ■ 1시간 만에 펌프장서 발견…수심 4m 아래
소방당국은 인력 59명, 장비 14대를 동원해 한강 방향으로 수색 범위를 넓혔다. 결국 오전 9시 42분경, 최초 지점에서 약 1.4km 떨어진 가양 빗물펌프장에서 A 씨를 발견했다. 그는 현장에서 곧바로 사망 판정을 받았다.
소방 관계자는 “빗물 펌프장 지하 2.5m 아래 수심 4m 정도 깊이의 물 속에 잠겨 있던 A 씨를 발견했다”며 “이미 심정지가 된 상태였다”고 밝혔다.
작업자의 시신이 발견된 가양 빗물처리장. 박태근 기자 ptk@donga.com 김수연 기자 xunnio410@donga.com ■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 퍼부어” 주민들 증언
구조대가 출동 당시 현장에는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고 당시 염창동 일대는 불과 10여분 사이 20㎜가 넘는 폭우가 집중됐다.
기자가 찾아간 현장 인근 상인들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퍼부었다. 우리 가게 주변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뉴스에서만 보던 일이 바로 앞에서 벌어졌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다”며 술렁였다.
인근의 한 음식점 사장은 “작업하다가 갑자기 비가 와서 떠내려 가신 것 같은데, 비가 그렇게 많이 오는데 어떤 이유로 거길 들어가신 건지 의아하다”고 안타까워했다.
한 편의점 직원은 “손님이 와서 사고가 났다고 말하더라. 사람이 빠져서 경찰차가 오고 그랬다. 당시 정말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작업자가 떠내려간 경로. 박태근 기자 ptk@donga.com 김수연 기자 xunnio410@donga.com ■ 비 오는 날 작업 금지 규정에도…관리 공백 논란
경찰과 소방은 갑작스러운 폭우로 물이 불어나 A 씨가 급류에 휩쓸린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 중이다.
비 오는 날에는 작업이 금지돼 있지만, 이미 오전 56시 기상청 예보에서 수도권 강우가 예측된 상황에서도 작업이 진행된 점이 도마에 올랐다. 기상청은 이튿날까지 예상 강수량을 3080㎜, 많은 곳은 최대 100㎜까지 예보했었다.
경찰은 “현재 조사 중인 사안이라 자세히 답할 수 없다”고 밝혔다.
사고 당시 현장에 발주 구청의 감리 담당자가 없었던 점도 논란이다. 구청 측은 “그 시간대에 현장에 없었던 것은 맞다”고 인정하면서도 “현장이 여러 군데라 시간대별로 옮겨 다닌다. 처음부터 끝까지 감리가 상주하는 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강서소방서 119구조대가 사고 상황을 기자들에게 브리핑 하고 있다. 박태근 기자 ptk@donga.com 김수연 기자 xunnio410@donga.com
■ 집중호우 땐 맨홀이 ‘도로의 블랙홀’
전문가들은 여름철 폭우 시 맨홀이 사실상 ‘도로의 블랙홀’로 변한다고 경고한다. 수압에 밀려 뚜껑이 열리거나 제자리를 이탈한 채 방치될 수 있어,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흙탕물 아래에 치명적인 위험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 사례도 적지 않다. 2022년 8월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인근에서는 중년 남매(당시 49·46세)가 폭우 속 맨홀에 빠져 숨졌다. 올해 6월 부산 연제구에선 30대 여성이, 이달 3일 광주 서구에선 20대 남성이 각각 맨홀에 빠졌다가 구조됐다. 모두 시간당 150~200㎜에 달하는 집중호우 속에서 발생한 사고였다.
소방 관계자는 “시간당 50㎜ 이상의 폭우가 쏟아지면 40㎏이 넘는 맨홀뚜껑도 날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 실험에서도 시간당 30㎜가 넘으면 저지대 맨홀 역류 현상이 시작되고, 50㎜ 이상이면 맨홀뚜껑이 열릴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도로에 물이 차기 시작하면 맨홀 근처에서 즉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한다. 특히 보행 시에는 도로 중앙보다는 건물 벽 쪽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 안전하다. 건물 쪽은 맨홀이 설치될 가능성이 적고, 벽을 짚으며 이동하면 미끄러짐이나 추락 위험도 줄일 수 있다.
강서소방서 소방관이 수색 작업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박태근 기자 ptk@donga.com 김수연 기자 xunnio410@donga.com
■ 폭우 시 보행자 안전수칙
△ 침수 시 보행 가능 수위는 무릎 높이(약 50㎝)까지. 그러나 물살이 거세면 15㎝에서도 휩쓸릴 수 있다.
△ 물 위에 기포·거품·소용돌이가 보이면 맨홀이 열려 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반드시 피해야 한다.
△ 불가피하게 물길을 건널 때는 보폭을 좁히고, 우산·막대기로 바닥을 짚으며 이동한다.
△ 신발은 슬리퍼·굽 높은 구두 대신 접지력 있는 운동화가 안전하다. 맨발일 경우 바닥을 미는 방식으로 걷는 것이 좋다.
△ 사람이 빠진 것을 목격했을 땐 직접 뛰어들지 말고, 우산·긴 막대기를 건네 잡도록 돕는다. 맨홀 주변은 지반이 약해져 무너질 수 있으니 접근을 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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