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강원 강릉시 주상수원인 오봉저수지 수문 아래까지 바닥이 훤희 드러나 거북등 처럼 갈라져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정수기 가동 못 해서 생수 사다 먹고 있어요. 설거지도 쉽지 않습니다.”
28일 오후 강원 강릉시 홍제동의 한 카페 사장 김하늬 씨(41)가 말했다. 카페 한쪽에는 500mL 생수병이 가득 쌓여 있었다. 같은 날 안목해변의 또 다른 가게에선 손님들이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매장 내 일회용 컵 사용은 금지지만 물부족으로 설거지가 어렵다 보니, 강릉시는 21일부터 식품접객업소와 집단급식소에 한해 한시적으로 허용했다. 강릉의 극심한 물 부족 현상은 가뭄에 더해 저수 인프라 부족과 늦은 대응이 겹친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28일 강원 강릉시 주상수원인 오봉저수지 수문 아래까지 바닥이 훤희 드러나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28일 한국농어촌공사에 따르면 이날 강릉 주요 상수원인 오봉저수지의 저수율은 15.9%로 평년(70.1%)의 22.7% 수준이다. 15% 아래로 내려가면 수도 공급량을 평소의 4분의 1로 줄이는 75% 제한급수가 시행된다. 강릉에서 75% 제한급수는 처음이다. 현재도 저수율 21.3%였던 20일부터 50% 제한급수가 시행 중이다.
시는 비상체제에 들어갔다. 지난달부터 공공수영장 3곳을 휴관했고, 다수의 공용화장실을 폐쇄했다. 경포해수욕장 세족용 수도도 일찌감치 막았다. 다음 달 1일 예정됐던 시 승격 70주년 기념행사도 연기했다. 시내 곳곳엔 물 절약을 당부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일부 음식점은 ‘27일부터 다음 달 6일까지 점심 영업만 한다’는 안내문을 붙였다.
지역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절수 경험담이 이어지고 있다. “물이 아까워 머리도 편히 못 감는다”, “화장실 청소를 물티슈로 했다”, “가족들 마실 물도 아끼며 산다”, “물 사정이 나아져도 절약하며 살겠다”는 글들이 올라왔다. 한 강릉 시민은 “맑은 공기, 쾌적한 자연환경 등 살기 좋은 곳으로 통하던 강릉이었는데, 이젠 가뭄과 물 부족으로 살기 어려운 지역처럼 여겨질 것 같아 걱정된다”고 했다.
극심한 가뭄으로 강원 강릉지역에 수도 계량기 50%를 잠그는 제한급수가 시행되는 가운데 28일 강릉시 홍제정수장에서 영동지역 소방차 와 한국도로공사 차량이 운반 급수를 통한 생활용수 지원에 나서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이 같은 강릉의 상황은 극심한 가뭄 등 자연적 요인과 저수 인프라 부족, 대응 미비 등 물 관리 부실이 겹쳤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기상청에 따르면 올해 강릉 강수량은 404.2㎜로, 평년(983.7㎜)의 41% 수준에 그쳤다. 다음 달 1, 2일 전국에 비 예보가 있지만 강릉에 내릴 비는 많지 않을 전망이다.
강릉은 지형적으로 ‘비 그림자 지역’에 속한다. 남서풍이 태백산맥을 넘으며 비구름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올해는 태풍 등 변수가 없고 장마도 일찍 끝나 강수량이 더 줄었다. 우진규 기상청 통보관은 “강릉은 평년에도 태백산맥 영향으로 비가 약해지는 지역인데, 올해는 전반적인 강수량 부족으로 피해가 컸다”고 설명했다.
저수 인프라 부족도 한계로 꼽힌다. 같은 동해안인 속초는 강릉과 강수량·강수일수가 비슷했지만, 물 부족은 없었다. 오히려 ‘워터밤’ 같은 물 축제를 열었다. 속초시는 2018년부터 ‘물 자립도시’를 내세워 쌍천 지하댐과 지하수 암반관정을 개발해 이후 안정적 급수 상황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강릉시는 생활용수의 87%를 오봉저수지에 의존한다. 남대천 지하저류댐 설치를 추진 중이지만 장기 대책이라 효과가 요원하다. 지하수 개발도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이 27일 오후 강원 강릉시청 재난안전상황실에서 가뭄 피해 및 생활 농업용수 대책 추진 상황 등을 점검하는 대책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행정안전부 제공) 2025.8.27행정의 늦장 대응도 도마에 올랐다. 강릉시가 가뭄 대응 비상대책을 발표한 것은 19일이다. 물 부족으로 지역 내 해수욕장들이 17일 이미 폐장한 상황이자, 50% 제한급수를 하루 앞둔 시점이었다. 이에 시민들 사이에서는 “시가 미리 예측해 물 부족에 대응했어야 하는데, 손을 놓고 있었다”는 불만이 나왔다.
강릉시는 뒤늦게 물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27일부터 급수차를 동원해 홍제정수장으로 물을 옮기고 있다. 23~25일엔 왕산면 도마천 일대에서 물길 터주기 공사를 벌여 오봉저수지 유입량을 늘렸다. 또 저수지 바닥 잔여 수량을 활용하는 사수량 확보 사업과 함께 퇴적토 유입 방지, 담수량 확대를 위한 하상 정비·준설도 병행 중이다.
전문가들은 달라진 기후 환경에 맞춘 체계적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박창근 가톨릭관동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강릉은 지형적 특성상 새로운 수원 개발이 쉽지 않다”며 “평창 도암댐 물을 농업용수로 돌리고 오봉저수지 물은 생활용수로만 쓰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고 조언했다. 정해수 기후·에너지 정책 싱크탱크 ‘넥스트’ 연구원은 “폭염에 따른 증발량 증가로 수자원이 급격히 준 것이 강릉 가뭄”이라며 “이런 현상에 대비한 별도 대응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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