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운드에 오른다, 투수들이 원하는 마운드를 빚는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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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 야구장 그라운드키퍼 일일 체험기
가장 먼저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 시즌 중엔 주말도 없이 매일 점검
여름엔 폭염-폭우로 더욱 분주… 잔디 병해-고사 예방이 관건
정비 상태가 경기력에 영향 미쳐… 마운드는 선수 요청따라 재정비
“불규칙 바운드 나올까 조마조마… 무탈하게 경기 끝날 때 가장 보람”

27일 프로야구 KT 위즈의 안방인 수원 KT위즈파크에서 그라운드키퍼 일일 체험에 나선 기자가 근무자들과 함께 마운드 정비 작업을 하고 있다. 야구장 그라운드 중 유일하게 도드라져 있는 마운드는 투수들의 부상 위험이 큰 곳이라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흙이 심하게 손상되기 때문에 딱딱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핵심이다. 수원=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27일 프로야구 KT 위즈의 안방인 수원 KT위즈파크에서 그라운드키퍼 일일 체험에 나선 기자가 근무자들과 함께 마운드 정비 작업을 하고 있다. 야구장 그라운드 중 유일하게 도드라져 있는 마운드는 투수들의 부상 위험이 큰 곳이라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다. 흙이 심하게 손상되기 때문에 딱딱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핵심이다. 수원=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야구장 ‘그라운드키퍼’의 세계

늦더위가 한창인 23일 한국프로야구는 역대 최소인 587경기 만에 1000만 관중을 돌파했다. 흥행의 주역인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누비기 전후에 무대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기 시작과 끝을 책임진다”는 자부심으로 야구장을 관리하는 ‘그라운드키퍼(groundkeeper)’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야구 인기에 일조하는 그라운드키퍼의 세계를 체험했다.

그라운드에 나선 지 10분이나 지났을까.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오던 땀줄기가 눈을 찔렀다. 따가운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흙먼지 묻은 작업복 옷소매로 눈가를 닦았다가는 흙이 눈에 들어올 것 같았다. ‘멋모르고 시작한 체험기를 빨리 끝내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려나.’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고개를 들자 이번엔 허리에서 시작된 뻐근함이 목뒤까지 치고 올라왔다.

한국프로야구는 총 587경기를 치른 23일 누적 관중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사상 처음으로 1000만 관중을 돌파했던 지난해(671경기)보다 빠른 속도다. 역대 최고 흥행을 이어가는 주역은 당연히 그라운드 위에서 굵은 땀을 흘리는 선수들이다.

경기는 심판의 “플레이 볼”과 함께 시작된다. 하지만 제대로 경기가 열리기 위해선 플레이를 위한 무대가 제대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야구 경기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사람들은 바로 ‘그라운드키퍼(ground keeper)’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본무대의 막 전과 막후에 묵묵히 제 역할을 해내는 이들의 하루를 따라가 봤다.》





● 업무 시작은 새벽 6시

수습 교육을 마치고 스포츠부에 배치받은 지 6개월이 지났다. 프로야구 경기장에 일찍 도착하는 날이면 기자실에서 텅 빈 그라운드를 멍하니 내려다볼 수 있는 ‘특권’도 조금씩 누리게 됐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선수들이 나와서 몸을 풀기 한참 전부터 그라운드를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구단 홍보팀 직원에게 물으니 그라운드 위 잔디와 흙을 관리하는 그라운드키퍼라고 했다. ‘내 기자 인생 첫 체험기는 이거다’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기자가 그라운드키퍼 일일 체험을 위해 KT 위즈의 안방구장인 경기 수원 KT위즈파크에 도착한 건 27일 오전 8시 30분경이었다. KIA를 불러들여 치르는 29일 안방경기를 이틀하고도 10시간 남겨둔 시점이었다. 폭염이 한풀 꺾였다고는 하지만 출근길에 땀으로 젖은 상의는 좀처럼 마를 기미가 없었다.

구장에서 만나기로 한 김상훈 그라운드키퍼 소장(64)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3루 쪽 더그아웃을 통해 그라운드에 들어서니 잔디깎이 차 한 대가 요란한 소음을 내며 외야 쪽 잔디 위를 오가고 있었다. 그 차에 김 소장이 타고 있었다. ‘일찍 나오셨다’는 인사말에 김 소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난 잔디에 물 주려고 아침 6시부터 나왔어. 일은 9시부터 시작할 거야. 나머지 근무자들은 그때 맞춰 출근하니 잠시 기다리면 돼. 아, 모자도 꼭 쓰고 나와. 안 그러면 쓰러져.”

김 소장은 그러면서 작업복이 담긴 가방을 건넸다. 그라운드키퍼 사무실로 기자를 안내한 김 소장은 “물 한잔 마시면서 쉬라”고 했다. 사무실 구석 냉장고 안에는 생수와 이온 음료가 가득 차 있었다.

● 그라운드의 생명은 흙

첫 작업은 홈플레이트와 타석 근처 흙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출근한 근무자들과 함께 포대 자루와 밀대 등을 챙겨 그라운드로 나왔다. 부업으로 농사를 지었던 부모님을 따라 어릴 적에 밭일을 도운 적이 있어 흙 정비는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그란 모양의 방수포를 걷어내자 치열했던 경기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타석을 표시하는 흰색 선은 경계가 희미해져 있었고, 좌우 타석 모두 홈플레이트 쪽이 깊게 파인 게 눈에 띄었다. 타자들이 밟고 서 있던 자리다. 불에 그을린 것처럼 검은 흙이 중간중간 섞여 있기도 했다.

새 흙을 충전하는 ‘탬핑(tamping) 작업’을 시작했다. 탬핑 작업은 오염된 흙을 걷어내고 새 흙을 채우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새 흙을 얹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새 흙이 표면에 안착할 수 있게 잘 다져줘야 한다. 일일 사수를 맡은 김민상 씨(26)가 기자에게 ‘탬퍼’(다짐봉)를 건넸다. 나무 봉 밑단에 평평한 쇠를 달아 자체 제작했다는 다짐 봉의 무게는 약 15kg에 달했다.

정강이 높이까지 다짐봉을 들었다가 수직으로 바닥에 내리찍으면서 땅을 단단하고 평평하게 만드는 작업이 이어졌다. 작업용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봉이 미끄러지면서 손이 쓸리곤 했다. 그때마다 따가운 통증이 밀려왔다. 3년 차 그라운드키퍼인 김 씨가 답답하다는 듯 “탕, 탕, 탕. 이렇게 ‘찰진’ 소리가 나야 해요”라고 말했다.

‘이 쇳덩어리에서 어떻게 찰진 소리가 나지?’라고 생각하던 찰나 김 씨가 다짐 봉으로 본을 보였다. 김 씨가 몇 차례 바닥을 내리치자 금속 재질이 땅과 만나 만드는 차가우면서도 묵직한 타격음이 텅 빈 구장에 메아리쳤다. 발밑으로는 땅이 울리는 게 느껴졌다. 기자의 ‘다짐질’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울퉁불퉁하기만 했던 흙이 금세 매끈하고 평평해졌다.

● 야구장에서 가장 도도한 곳, 마운드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다음 작업 장소인 마운드로 향했다. 홈플레이트에서 18.44m 떨어진 마운드로 이동하는 데 한 시간이 걸린 것. 기온이 점점 올라가면서 기자의 표정이 멍해졌나 보다. 김 씨가 “이렇게 밖에서 몸 쓰는 건 오랜만이죠? 그런데 마운드 작업이 더 까다로워요”라고 말했다. 격려와 경고 그 중간 어디쯤의 말이었다.

프로야구 야구장 마운드는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정한 규격을 따른다. 이에 따르면 높이는 25.4cm(10인치) 이내, 경사는 30.5cm(1피트)당 2.54cm(1인치)로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매 경기 마운드가 이 상태를 벗어나지 않게 유지하는 게 그라운드키퍼가 하는 주요한 일 중 하나다.

지름 5.48m인 마운드 위에서 양 팀 투수가 던지는 공은 한 경기에 보통 300개 정도다. 투수가 공을 던질 때마다 스파이크에 차이고 파이기 때문에 야구장에서 흙이 가장 심하게 손상되는 곳이 마운드다. 또 투수마다 원하는 흙 상태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늘 각별하게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한다.

야구장 마운드에는 아예 ‘마운드 클레이(mound clay)’라고 이름이 붙은 흙을 깐다. 마운드 클레이는 점토 함량이 약 60%에 달해 점성이 강하다. 내야 그라운드에 쓰는 ‘인필드 믹스(infield mix)’보다 점토 함유 비율이 3배 이상 높다.

이날도 마운드 흙을 메웠다가 파는 작업만 30분을 반복했다. 새 흙을 보충한 뒤 바닥에 납작 엎드려 마운드 상태를 확인하면 다른 근무자가 흙을 긁어내거나 단단하게 다지는 식으로 역할을 나눈다. 김 씨는 “정비가 잘 안 돼 있으면 경기 후반에 흙이 꺼지는 경우가 있다”며 “마운드는 투수들의 부상 위험이 큰 곳이라 늘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유지하려고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고 했다.

● 폭염·폭우와의 전쟁

그라운드키퍼는 여름철에 더욱 분주해진다. 프로야구 1군 경기가 열리는 전국 구장 12곳 가운데 키움이 안방으로 쓰는 서울 고척스카이돔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야외 구장이다. 구장의 흙과 잔디 모두 폭염과 폭우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다.

한국 야구장에는 보통 ‘켄터키 블루그래스’라는 잔디 품종을 깐다. 이 품종은 원래 15∼24도에서 자라는 한지형(寒地型)이다. 문제는 한국의 여름 날씨가 갈수록 더워진다는 데 있다. 5일 기상청 발표에 따르면 지난달 폭염 일수는 전국 평균 14.5일이었다. 기상청은 하루 최고기온이 33도 이상이면 폭염으로 본다.

여기에 폭우까지 겹치면 상황은 더 악화된다. 여름처럼 온도가 높은 상태에서 흙이 비에 젖으면 각종 병해의 위험이 커진다. 비가 오는 날에는 그라운드가 젖지 않도록 방수포를 깔아놓기도 하는데 이때 방수포가 수분과 함께 지면의 열을 가두면서 잔디가 고사할 위험을 키운다. 그래서 비가 예보된 상황에도 방수포를 미리 펼쳐 놓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그라운드키퍼는 늦은 밤이나 새벽에 출근해야 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김 소장이 이날 일찍 출근한 이유도 잔디였다. 여름철에는 날이 뜨거워지기 전에 물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김 소장은 “기온이 높을 때 물을 주면 찌는 현상이 발생해 잔디가 쉽게 죽을 수 있다”며 “아침 일찍 구장에 출근하면 2, 3시간가량 잔디 관리에 집중한다. 한국 여름 날씨가 점점 동남아시아처럼 변하고 있어 잔디 관리가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있다”고 했다.

● 시작도 끝도 우리

그라운드키퍼는 시즌 중에는 주말도 없이 매일 구장에 나와 경기장 상태를 점검한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내린다고 한 날이면 꼼짝없이 사무실에서 대기해야 한다. 식사를 거르는 일도 다반사다. 밤늦게 경기가 끝난 뒤 간단한 정비 작업을 마치면 오후 11시가 되어서야 퇴근하는 것이 일상이다. 연장전으로 경기가 길어지면 퇴근 시간은 그만큼 늦어진다.

그라운드 정비 상태는 선수들 경기력에도 적잖은 영향을 준다. 흙에 수분이 너무 많으면 땅이 미끄러워 공의 바운드가 죽고, 반대로 수분이 너무 적으면 바운드가 크게 튀어 오른다. 이 때문에 선수마다 좋아하는 습도가 따로 있다. 김 소장은 “혹시라도 불규칙 바운드가 일어날까 경기 보는 내내 조마조마하다”면서 “누구 하나 다치는 사람 없이 무탈하게 경기가 끝났을 때마다 정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마운드도 마찬가지다. 한화 이글스 관계자는 “폰세(31·미국) 같은 외국인 투수들은 한국 선수들보다 더 딱딱한 마운드를 선호하는 편”이라며 “사람마다 신체 조건과 투구 폼 등이 다르기 때문에 선호하는 마운드 상태도 다르다”고 말했다.

선수들 요청 사항에 따라 땅 상태를 재정비하는 것도 그라운드키퍼의 역할이다. 이창열 NC 다이노스 그라운드키퍼 소장(55)은 “‘영업 비밀’이라 일일이 말하기는 어렵지만 잘하는 선수일수록 ‘발 내딛는 곳이 더 촉촉하면 좋겠다’는 식으로 요구 조건이 구체적이다”면서 “선수들 요청에 맞게 그라운드 정비를 잘 마쳤다고 생각이 들면 하는 일에 자부심이 든다”고 했다. 안방 팀이 조금이나마 유리할 수 있는 이유다.

그라운드키퍼를 따로 챙기는 선수도 적지 않다. 김 소장은 “지금은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한 박병호 선수(39)가 KT에서 뛰던 시절 그라운드키퍼들에게 신발을 선물해 준 적이 있다”며 “우리 노력을 이해해 주고 ‘고맙다’고 인사해 주는 선수들을 볼 때마다 뿌듯한 마음이 크다”고 했다.

체험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샤워를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1000만 관중을 환호하게 만드는 야구라는 드라마는 오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구장에서 보내는 이들이 없으면 결코 완성될 수 없다. 프로야구에도 영화처럼 엔딩 크레디트가 있다면 완벽한 그라운드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의 이름 석 자도 함께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그라운드키퍼(ground keeper)
프로야구 경기장의 잔디와 흙, 시설 등을 관리하는 사람. 최적의 경기 환경을 조성해 선수들이 부상 없이 최상의 경기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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