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원 입구에 붙은 안내문. 가난한 환자들만을 위한 병원임을 강조하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고 병원장은 이 병원 유일한 상근 의사다. 그가 일하는 2층 약 20평 공간에는 진료실 3개와 처치실, 간호사 대기실, 환자대기실, 엘리베이터로 꽉 차 있다. 좁은 공간을 나눠 필요한 집기를 구겨넣느라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1층 접수대와 3층 약국 외에도 검사실 진료실 물리치료실 간호실 등이 층마다 나뉘어 있다. 7층은 미사를 드리는 경당으로 사용한다.
“병원 크기를 절반으로 줄이고 식사봉사 같은 건 아예 포기했습니다. 그런데도 영등포 병원 보상액보다 돈이 두 배 이상 들었어요. 방문의료팀과 행정인력 등 직원 15명은 200m 떨어진 사무실을 빌렸습니다.”
이날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하기 전 고원장은 최근 쇄골 골절 수술을 한 요셉의원 봉사자의 상처 드레싱을 해줬다. 신학생으로 영등포시절부터 요셉의원에서 방문진료 활동을 함께 해왔다는 이 봉사자는 새로 옮긴 서울역에서도 빨리 방문진료가 재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아침부터 아무 것도 못 먹었어요”
오후 1시. 시범운영 중이지만 환자는 끊임없이 찾아왔다. 영등포 시절 환자가 많다.
손목이 아프다는 외국인 D씨는 한국어가 안 돼 서툰 영어로 의사소통했다. 그가 진료 중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하자 고 원장은 근육이완제 등을 처방해준 뒤 자원봉사자를 불러 “직원식당에 데려가 뭘 좀 먹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에티오피아에서 온 그는 종교문제로 난민신청을 했는데 몸이 아프면 요셉의원을 찾아왔다.
모든 환자는 1층 접수를 거쳐 진료실로 보내지는데 ‘의료급여 1종이라 앞으로 진료해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환자들이 무척 서운해했다. 의료급여 1종은 근로능력이 없다고 판정받은 기초생활수급자로 일반 병원에서도 1000~2000원만 내면 진료받을 수 있다.
“저희는 여력이 별로 없는데 그분들 봐드리다가 더 곤란한 분들을 못 봐드리면 안되니까요. 기초생활 수급 환자를 저희가 진료하면 주변 의원들 환자가 줄어 난처하기도 하죠.”
이런 환자들은 고원장이 전후사정을 일일이 설명해주면 납득하고는 “마지막이니까” 하면서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더 물어봤다. 고원장도 “마지막이니까”하며 이것저것 더 챙겨줬다.
지팡이를 짚고 거동이 무척 불편한 환자는 고 원장 지시로 찍은 MRI 영상을 가져왔다. 고 원장은 “역시 그렇군”하며 척추관협착증 진단을 내린 뒤 보라매병원 수술을 주선하겠다고 했다.
환자는 겁이 났는지 다른 치료법은 없냐고 물었지만 목의 디스크가 튀어나와 경추 신경관을 압박하는 상황은 문외한이 봐도 알 정도였다.
고원장은 “일반 치료로는 안되고 척추강을 넓히는 수술을 해야 한다. 수술만 하면 확실히 좋아진다”며 벌써부터 자기 몸을 고친 듯 기분 좋아했다. 먹구름이 꼈던 환자 안색도 ‘다시 잘 걸을 수 있다’는 말에 밝아지는 듯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병원’
요셉의원은 1987년 고(故) 선우경식 원장이 달동네 많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개원한 이래, 신림동에서 10년, 영등포 쪽방촌에서 28년간 빈민 무료 진료를 이어왔다. 현재까지 요셉의원에서 치료받은 환자는 77만 여 명에 달한다.
무급 봉사 의사 130여 명, 일반 봉사자 700여 명, 정기 후원자 5500여 명이 요셉의원을 든든하게 받쳐준다. 운영중인 진료과는 15개로 종합병원을 방불케한다. 내과 외과 피부과 안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비뇨기과 신경과 신경외과 정신과 재활의학과 치과 영상의학 통증클리닉 한의과 전문의들이 일정표에 맞춰 진료해준다.
진료시간은 평일 오후 1시부터 밤 9시까지. 쪽방촌 주민들 라이프스타일과 본업을 마친 뒤 야간진료를 하러 오는 봉사 의사들을 배려한 시간표다.
병원은 개원 이래 환자들로부터 한푼도 받지 않고 모든 것을 내줘왔다. 약값이며 자재값 치과치료도 모두 무료다. 수술이 필요한 경우 보라매병원 등 제휴병원에 의뢰하고, 비용이 필요하면 요셉나눔재단에서 내주기도 한다.
―돈 들어오는 데가 없는데 어떻게 비용을 충당하나요.
“정기후원자 5500여 명 덕분입니다. 부모님 유언을 받들어 한번에 몇 억씩 기탁하는 후원자도 계시구요. ‘오래 치료해줘 고맙다’며 100만원 봉투를 놓고 가신 분도 기억납니다. 생계급여 80만원 받는 분이었는데, 한달 생활비보다 많이 기부하신 거죠. 얼마 전 돌아가셨어요.”
재개발로 인해 병원을 옮길 때마다 더 많은 도시 빈민을 찾아갔다. 서울역에 자리를 잡은 것도 부근에 노숙인 500여명, 동자동과 중림동, 후암동 등에 쪽방촌 주민 3000여 명이 있어서다. 영등포 요셉의원에 다니던 환자들이나 자원봉사자들의 동선도 고려했다.
지난달 29일 있었던 요셉의원 서울역 이전 개원 축복식에서 정순택 대주교를 비롯한 참가자들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요셉의원 제공
“의사는 누군가를 돕기에 아주 좋은 직업”
고 원장으로서는 요셉의원 원장을 맡은 2023년부터가 인생 2막이다. 2018년 건국대 의대 신경외과 교수로 정년퇴직했고 요셉의원에서는 36년간 진료 봉사를 해왔다.
“의대생 시절부터 따진다면 50년간 의료봉사를 해왔지요. 의사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 아주 좋은 직업이예요. 학생들에게 ‘의사처럼 봉사하기 쉬운 직업이 없다, 가장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내 것을 움켜쥐는 게 아니고 손을 펴서 나누는 거다’ 이런 얘기를 해왔거든요. 저는 의사가 되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한때 신부가 되려 했다고요.
“부모님이 (6.25) 전쟁 때 이북에서 내려오셨는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예요. 저희가 3형제인데 모두 어려서부터 성당에서 복사(사제의 미사 집전을 보조하는 평신도) 일을 했어요.
1960년 4.19때 저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시위대에 휩쓸려 하루 실종된 일이 있었어요. 어느 대학생 도움으로 이튿날 집에 돌아갔는데 밤새도록 제가 큰 일 당했을까봐 걱정했던 부모님은 하늘의 뜻이라며, 그때부터 저를 신부로 만들겠다고 하셨죠.”
―그런데 어떻게 의사가 됐나요.
“중학교부터 신부가 되기 위한 학교에 다니다가 1970년 일반고 3학년으로 편입을 했어요. 1968년부터 대입 예비고사 제도가 생겼는데 신학교 선배들 70~80%가 예비고사에서 떨어졌어요. 신학대학에 가서 신부가 돼야 하는데 예비고사라는 벽에 부딪혀 좌절한 거죠.
우리가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뭐가 문제가 있는지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대학생인 형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너 생각 잘했다’며 방법을 찾다가 마침 새로 생긴 신일고등학교 편입생 모집 광고를 가져왔어요.
3학년 5명을 뽑았는데 전국에서 750명이 지원했어요. 서울대 들어가면 4년 전액 장학금을 준다고 했거든요. 요행히도 붙었는데 고 3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미적분 같은 건 하나도 안 배웠거든요. 제2외국어도 독일어가 아니라 라틴어를 배우는 식이었고…”
―그렇게 서울대 의대에 들어가셨다는….
“재수할 각오까지 했는데 그렇게 됐네요. 수학은 20~30점 맞았을 거고 다른 과목에서 메웠겠죠. 신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과목들을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어요. 신부가 영혼을 고쳐주는 존재라면 의사는 몸을 고쳐주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이 저를 의사로 만들려는 계획이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하하.”
그의 안과의사 차남도 요셉의원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십일조 개념으로 한달에 3일은 의료봉사
원장을 맡기 전에는 요셉의원과 전진상의원, 라파엘 클리닉 에 정기 진료봉사를 나갔다.
“십일조 개념이었어요. 제 시간과 노력의 10분의 1을 남들과 나눈다는 생각에 매달 사흘을 봉사에 할당했습니다. 세 병원은 모두 김수환 추기경이 애정을 쏟은 자선의료기관입니다.”
진료봉사를 하면서 추기경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격려를 받았다고 한다.
“저로서는 시간만 조금 내서 하는 건데 추기경님같이 훌륭한 분이 ‘하느님께 축복받을 만한 일’이란 식으로 얘기해 주시니 의사로서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꾸준히 했지요. 또 주변 사람들한테도 자꾸 권하다 보니 점점 일이 커지더군요.”
평소 별명은 ‘의사 낚아오는 어부’. 세 병원에서 봉사하면서 같은 길을 걷도록 ‘낚아온’ 동료의사가 50명은 된다고 한다. 이 중에는 30년 이상 봉사해온 분들도 적지 않다.
―언제까지 하실 생각인가요.
“선우경식 원장님이 21년 간 하셨고 신완식 원장님이 14년 간 하셨더군요. 그럼 저는 7년인가? 하하.. 일단 5년 임기로 했고 필요하면 연장하면 되죠.”
1987년 요셉의원이 개원한 서울 신림동 달동네는 주거환경도 위생상태도 열악했다. 요셉의원 개원 전 무료진료하던 ‘사랑의 집’ 입구. 요셉의원 제공
1987년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개원한 당시 요셉의원. 요셉의원 제공
재개발로 밀려 1997년 영등포로 자리를 옮긴 요셉의원. 당시 녹십자혈액원 건물을 구입했다. 경비절감을 위해 신림동 병원에서 문짝이며 집기며 쓸만한 것은 모두 떼어다가 재활용했다. 재료비가 모자라면 어디선가 독지가가 나타나 창틀값을 대고 커튼을 달아주는 식으로 공사가 진행됐다고 한다. 요셉의원 제공
대를 잇는 ‘영등포 슈바이처’들
환자를 진료하는 고 선우경식 원장. 1987년부터 21년간 꾸준한 헌신으로 요셉의원을 반석에 올려놓았다. 요셉의원 제공‘영등포 슈바이처’의 원조는 고 선우경식 박사다. 1980년대 관악구 신림동 달동네에서 가톨릭의대 학생들이 시작한 빈민활동의 일환으로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배가 아프다고 해서 약을 준 사람이 위암을, 그리고 기침하는 환자가 폐암을 앓게 되자 정밀검사를 할 수 있는 병원 설립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고 이것이 요셉의원 설립으로 이어졌다.
당시 그가 돈을 안 받는 무료 병원을 열겠다고 하자 주변 사람 모두가 “얼마 못 갈 것”이라며 불안하게 지켜봤다. 하지만 그는 동료 선후배들로부터 꾸준히 봉사와 후원을 이끌어내며 200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년간 병원을 이끌었다.
그 뒤 요셉의원은 신부와 의사가 2인3각 형태로 이끌어왔다. 상근 의사로는 신완식 가톨릭의대 교수가 2009년 정년을 6년 남겨두고 명예퇴직한 뒤 요셉의원 의무원장으로 부임해 14년간 봉사했다. 감염내과 분야에서 국내 권위자로 꼽혔던 신 박사는 병원장 직을 내려놓은 요즘도 주 2회 4시간씩 의료봉사하러 나온다.
60대 이상 은퇴자들이 대들보 역할
지난 5월 삼성호암상 시상식에서 고 원장과 요셉나눔재단 사무총장인 홍근표 바오로 신부(66)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됐다. 그들의 맛깔나는 얘기가 재미있었는데, 특히 “요셉의원은 은퇴자들이 떠받치는 일터”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은퇴 연령대인 분들이 ‘열일’ 하고 있지요. 상근 직원은 30여 명인데 50대면 아주 젊은 축이고 60대가 주축입니다. 간호팀장은 서울대 병원 간호팀 부장하다가 정년퇴직하고나서 이곳에 왔지요.”
간호사 4명과 사회복지사, 치위생사, 행정직원 등 상근직원의 급여는 모두 최저임금이다.
“너무 저임금이라 젊은 분들은 힘들어해요. 미래가 있고 기회비용 따져야 하고 가족도 돌봐야 하잖아요. 매일 밤 9시까지 근무도 문제죠. 미혼인 분들은 데이트도 해야 하는데 말이죠. 고령자들은 별 상관 없으니 기쁘게 일하는 거구요.”
―이런 일은 연세 드신 분들이 해주는 게 사회적 분업인 것 같습니다.
“본업에서 꽃 피울 만큼 피우셨고 조금 여력이 남은 분들이 여기서 또 한 번 인생의 꽃을 피우고 있는 거죠. 돈은 못 벌지만 보람 있고 ‘내 역할’이 있다는 기쁨도 있죠. 재능기부가 굉장히 많이 필요한 병원이예요.”
진료봉사 오는 분들도 쟁쟁했던 의사가 많다. 예컨대 이날 출근한 양정현 교수는 삼성의료원 부원장과 건대의료원장을 역임한 한국 유방암 수술의 권위자다.
고원장은 매주 수요일엔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기 위해 일을 쉰다. 그의 걱정은 가난한 사람들 못지 않게 초고령사회 노인들에게도 미치고 있었다.
“혼자 있는 노인들이 굉장히 위험해요. 우울증이나 치매에 걸리기 쉽고 이런 요소들은 악순환의 사슬로 연결돼 있어요. 제 어머니가 103세이신데, 제가 적어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찾아뵙거든요. 그런 게 필요해요. 가족과 지인들이 함께 식사하고 안부 묻고 들여다보는 것. 주민센터 같은 곳에서 하는 도시락배달이나 안부전화 걸기 같은 활동도 좋죠. 공적 사적 네트워킹이 모두 필요합니다. 최소한 고독사의 공포는 없도록 해야죠.”
통계로 잡히지 않는 ‘찾아가는 의료’의 성과
요셉의원은 2022년 요셉나눔재단법인으로 확대 개편됐다. 조직상으로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사목국 산하 기관이다. 이때부터 재단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홍근표 신부는 특히 방문의료에 관심이 많다.
2023년 10월부터 환자들을 직접 찾아가는 진료를 시작했다. 의사 간호사 사회복지사 약사 청년봉사자가 한 팀이 되어 각 가정을 방문해 진료나 간호, 복약지도를 해주는 방식이다. 다음은 홍근표 사무총장 신부의 설명이다.
홍근표 요셉나눔재단 사무총장 신부가 김수환 추기경과 선우경식 1대 원장의 사진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그는 스스로를 돌보기 힘든 환자들을 발견하고 돕기 위해 방문의료팀이 환자를 찾아가는 의료시스템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병원에 스스로 찾아오는 환자들만 해도 자기관리가 되는 분들입니다. 중증 질환자, 거동이 불편한 환자, 은둔 환자 등은 아예 방에서 나오지를 않죠. 자신을 포기하고 방치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 돌봄이 필요한 이웃에게 진료와 건강관리 서비스를 펼치는 게 방문진료입니다.”
그는 ‘누군가가 죽으면 뉴스에 나오는데 죽을 위기를 잘 넘기면 뉴스에 안 나온다’며 영등포 쪽방촌의 방문진료 경험을 얘기했다.
“2023년 겨울(2022년 12월~2023년 2월) 200명 안팎이 모여 사는 쪽방촌에서 21명이 사망했어요. 약 10%죠. 그 해 10월부터 저희가 방문진료를 시작하면서 쪽방촌 긴급상황을 도맡게 됐는데 이듬해 겨울 사망자는 5명, 2025년에는 6명으로 줄었습니다. 통계로 말하자면 매년 얼추 15명을 살려낸 셈이 됩니다.
물론 그 살아난 분이 ‘살려줘서 고맙다’고 하는 건 아니죠. 또 술 먹고 와서 투정 부리고 약 달라고 하고 그러면서 지내겠죠. 그래도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원봉사자나 후원자들께 저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이 기여하고 기부해 주신 게 정말 의미 있었습니다. 그런데 통계에는 안 나옵니다. 그거야말로 좋은 뉴스 아니겠습니까’라고요.”
새 병원이 자리가 잡히는 9월 중순부터 요셉이웃사랑센터(센터장 안분이 수녀)가 중심이 돼 용산구 동자동과 종로 쪽방촌, 서울역 주변 고시원 등에 대한 방문사업을 벌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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