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애니, OTT 타고 글로벌 대중문화로… 시장규모 30조원 돌파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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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 ‘귀멸의 칼날’ 극장가 돌풍… ‘오타쿠’ 문화 벗어난 일본 만화영화
개봉 10일 만에 관중 300만 명 돌파… 입체적 캐릭터-영상미에 매력 느껴
“2030 관객은 민족 감정 없이 향유”… OTT 확산으로 접근의 제약 해결
OSMU-제작위원회시스템 등 영향… 자국보다 해외 시장 몸집 더 커져

《‘귀멸의 칼날’ 열풍… 日애니의 변신

극장가 침체 속에서도 개봉 열흘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가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그 주인공. 마니아 팬의 전유물에서 글로벌 흥행작으로 떠오른 일본 애니메이션의 변신을 짚어 본다.》


올해 개봉작 중 최단 기간 300만 명을 돌파한 영화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애니맥스브로드캐스팅코리아 제공
올해 개봉작 중 최단 기간 300만 명을 돌파한 영화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애니맥스브로드캐스팅코리아 제공
지난달 22일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의 흥행세가 가파르다. 관객 300만 명을 돌파하는 데 걸린 시간이 불과 10일. 올해 최고 흥행작인 ‘좀비딸’(11일)보다 하루 빠른 속도다.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3일 기준 ‘무한성편’의 누적 관객 수는 약 339만 명, 매출액은 약 366억 원에 이른다. 최근 한국 극장가가 겪고 있는 침체기를 생각하면 놀라운 성적이다.

이른바 ‘오타쿠(おたく)’라 불리는 일부 마니아 팬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일본 만화책 기반의 ‘아니메(アニメ·애니메이션)’가 세계를 주름잡는 글로벌 콘텐츠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나 신카이 마코토(新海誠) 감독 등의 예술성이 가득한 애니메이션과 별개로, 종이 만화에서 TV 시리즈와 영화로 이어지는 일본의 ‘만화 콘텐츠’는 주로 서브컬처나 B급 문화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가파르게 성장하며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자 글로벌 시장에서 주류로 진입하는 분위기다. 국내에서도 이런 ‘망가(漫畵) 컬처’를 즐기는 분위기에 대한 거부감이 낮아진 것으로 풀이된다.

● 만화와 TV, 영화의 삼각편대

그런 맥락에서 ‘귀멸의 칼날’은 만화와 TV 시리즈, 영화로 이어지는 일본 식 삼각편대 공식의 전형적인 사례다. 일본 만화가 고토게 고요하루 작가가 2016∼2020년 ‘주간 소년 점프’에서 연재한 원작 만화는 누적 부수가 2억2000만 부를 넘긴 대형 히트작. 혈귀에게 가족을 잃은 소년 탄지로가 혈귀가 된 여동생 네즈코를 인간으로 돌려놓기 위해 ‘귀살대’에 입대해 싸우는 이야기가 뼈대다.

이 작품은 만화가 성공하고 2019년 TV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뒤 팬덤이 급격히 커지자 2020년 첫 번째 영화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을 선보였다. 그리고 올해 두 번째 영화 ‘무한성편’은 혈귀의 본거지인 무한성에서 귀살대와 혈귀들이 펼치는 최종 결전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다.

이런 공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귀멸의 칼날’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엄청난 파급력을 갖는 건 유례가 없다. 일본에선 7월 18일 개봉해 현재 관객 수 2000만 명 돌파를 앞두고 있고, 국내에서도 개봉 전날 사전 예매량만 79만 장에 이르렀다. CGV 관계자는 “N차 관람을 하는 재관람률이 7%로 2∼3%인 다른 영화보다 높은 편”이라며 “초기엔 팬덤에 어필하는 분위기였지만, 점차 그 이상의 대중적 확장성을 가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이 작품이 흥행하면서 국내 개봉한 역대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 순위가 바뀌고 있다. ‘무한성편’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년)의 기록을 뛰어넘으며 4위로 올라섰다. 현재 기세라면 3위 ‘너의 이름은’(2017년)도 곧 뛰어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극장가에선 ‘넘사벽(넘을 수 없는 벽)’으로 여겨졌던 2위 ‘더 퍼스트 슬램덩크’(2023년)와 1위 ‘스즈메의 문단속’(2023년)에 도전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이처럼 뜨거운 반응은 적지 않은 장애물을 뛰어넘었단 점에서도 이례적이다. 개봉 전만 해도 작품의 배경인 다이쇼 시대가 일본 제국주의 팽창기였다는 점, 주인공 탄지로의 귀걸이가 전범기를 연상시킨다는 점 등으로 ‘극우 논란’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복절을 앞둔 지난달 9일 LG 트윈스와 한화 이글스의 프로야구 경기에서 귀멸의 칼날 시구 이벤트를 진행하려다가 비판이 커져 취소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하지만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깔 게 없다’는 입소문을 타며 영화는 승승장구하고 있다. 입체적인 서사를 보여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특히 높은 점수를 얻었다. 영화계 관계자는 “빠른 액션과 함께 캐릭터별 사연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며 호흡을 조절하는 구조가 영화적 재미를 더했다”는 분석을 내놨다. 특히 악당인 혈귀 아카자의 인간 시절 비극적인 과거가 관객들의 연민과 공감을 얻어냈다.

3차원(3D) 컴퓨터그래픽(CG)으로 구현한 무한성의 배경에 2차원(2D) 작화를 자연스럽게 융합한 점도 호평을 받고 있다. 수입사 애니플러스 측은 “각 캐릭터 고유의 서사가 살아 있는 데다 뛰어난 영상미와 액션, 음악 등이 관객들의 호응을 얻은 것 같다”며 “어느 나라나 공감할 수 있는 ‘가족애’라는 보편적 정서도 인기의 핵심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관객들의 반응은 뜨겁다. 원작 팬인 박모 씨(31)는 “만화책을 봐서 이미 결말을 알고 갔는데도 눈물이 날 정도로 서사가 탄탄했다”며 “곧 재관람하러 갈 것”이라고 말했다. 원작을 잘 모르고 보러 간 윤모 씨(32)도 “몰입감 있는 작화와 생생한 전투신 때문에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며 “일본 전통 문화가 많이 등장했지만 큰 거부감은 없었다”고 말했다.

● 넷플릭스 “구독자 50%, 애니 즐겨”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
이런 일본 애니메이션의 인기는 ‘귀멸의 칼날’뿐만이 아니다. 올해 3월 개봉한 ‘극장판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은 초기엔 다소 조용했으나 최근 역주행하며 100만 명 돌파를 앞두고 있다. 지난달 개봉한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도 누적 관객 73만 명을 달성했다. 이달 24일 개봉 예정인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도 벌써부터 관심이 적지 않다.

‘그들만의 리그’처럼 여겨지던 일본 만화영화들이 국내 극장가에서 이처럼 힘을 발휘하는 이유는 뭘까. 과거에도 일본 만화는 마니아들의 인기를 누렸지만, 이처럼 대중적인 흐름을 타진 못했다. 이는 일본 문화에 대한 젊은 세대의 정서 자체가 달라 사회적 분위기가 바뀌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지나친 왜색은 다소 꺼렸던 과거 세대들과 달리, 요즘 2030 관객들은 민족적인 감정을 갖고 영화를 보지 않고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종이 만화로 접한 뒤 TV 시리즈, 영화로 이어서 즐기는 일본 망가 문화에 익숙해진 상황이라 받아들이는 작품의 폭도 점차 넓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2020년대 이후의 OTT 확산은 K콘텐츠의 성공에도 공을 세웠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의 글로벌 대중화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일본 현지 방송에서 방영했던 TV 시리즈를 OTT를 통해 이전보다 훨씬 편하게 볼 수 있게 됨으로써, 극장판 영화도 자연스럽게 찾아보게 만든 것이다. 한마디로 OTT는 이런 ‘접근의 제약’ 문제를 해결해 버린 셈이다.

실제로 넷플릭스는 올 7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린 ‘일본 애니메이션 박람회’에서 “구독자의 50% 이상인 3억 명이 애니메이션을 시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5년 동안 약 3배가 증가한 수치다. 국내에서도 애니메이션 전문 OTT 플랫폼인 ‘라프텔’의 유료 결제 이용자가 2022년 17만 명에서 2024년 28만 명으로 약 64% 증가했다. 월간활성이용자(MAU) 또한 올 7월 100만 명을 돌파했다.

● “日 아니메 시장, 30조 원 넘어”

아무리 쉽게 접근할 수 있어도 재미가 없으면 보지 않는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일본 만화영화는 오랜 역사와 저력을 축적해 왔다. 종이 만화를 바탕으로 영화까지 이어지는 제작 시스템에는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이 담겨 있다.

일본은 원작 만화를 토대로 TV 시리즈, 극장판, 굿즈로 이어지는 ‘원소스 멀티유스(OSMU)’ 시스템을 일찌감치 구축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일본에는 ‘제작위원회 시스템’이란 독특한 문화가 있다. 출판사와 방송사, 제작사, 광고사가 함께 자금을 모아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일본만의 방식이다. 이를 바탕으로 1990년대 이후 일본 만화영화 산업을 크게 확장시켰다.

이러한 구조는 미국이나 한국과는 상당히 다르다. 미국은 마블의 사례에서 보듯, 초인 중심의 코믹스(만화)를 실사 블록버스터로 발전시켰다. 후발주자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의 경우엔 최근 웹소설이 인기를 끌면 웹툰으로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드라마나 영화로 실사화하는 OSMU 시스템이 정착화됐다.

여기서 가장 큰 차이점은 일본은 만화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만화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게 가장 적합한 표현 매체라는 시각을 고수한다. 이는 여러 실사 영화나 드라마들이 원작 팬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도 기인한다.

실제로 일본 만화는 실사화한 작품이 성공한 사례가 ‘데스노트’ 정도를 제외하면 극히 드물다. 만화 특유의 과장된 표현을 디테일하게 구현하려다 보니 부자연스럽게 보인다는 평가가 많았기 때문이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일본은 만화에서 시작된 팬덤을 유지하기 위해 각색을 최소화하는 경향이 있다”며 “각색할 때도 팬들을 존중하면서 기본적인 팬덤을 유지하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흥행 잠재력도 더 크다”고 설명했다.

산업 규모도 성장세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 동향’에 따르면 2023년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 규모는 3조3465억 엔(약 30조5177억 원)으로 2022년보다 14.3% 증가했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과거 ‘내수용’이라 평가받던 일본 애니메이션이 이젠 자국 시장(1조6243억 엔)보다 해외 시장(1조7222억 엔) 규모가 더 커졌단 점이다.

성장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2002년 시장 규모가 1조 엔을 돌파한 뒤 2조 엔을 넘을 때(2017년)까지 15년이 걸렸다. 하지만 3조 엔 돌파(2023년)는 불과 6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진흥원관계자는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의 영향으로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 규모는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며 “하지만 청소년이 성인이 된 뒤에도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소비하는 1세대(1958년 전후 출생)가 지속적으로 소비를 이어가고 있어 ‘실질적인 소비 인구’는 줄지 않고 있다”고 분석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이제 세상은 내가 좋아하는 취향에 어울리는 콘텐츠를 선택해서 보는 시대”라며 “일본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드라마나 음악 등 전반적 문화에 대한 소비층이 늘어나는 추세다. 과거처럼 단순한 국가주의적인 시각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침공’ 같은 식으로 해석하면 지금 현상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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