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 “자식 성공 위해서라면…” 치열한 골프 대디-골프 마미의 세계
새벽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자녀만큼 바쁘고 치열한 일상
비거리-퍼팅-멘털 클리닉까지… 年 1억5000만원 넘게 들기도
KLPGA 정회원 48명에 들려면, 10대 1 경쟁 뚫어야 해 험난
《골프 대디-골프 마미의 24시간
저출산으로 유소년 인구는 줄고 있지만 프로골퍼 꿈을 키우는 유소년 선수는 매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을 지원하는 ‘골프 대디-마미’도 동반 증가세다. 자녀의 성공을 위해 365일 동행하는 이들의 일상을 들여다봤다.》
한국에서 자녀에게 골프를 권하는 부모는 이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2004년 한국여자프로골프대상 공로상과 특별상을 받았던 안시현(41)은 최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어머니가 내게 ‘네가 아파트 몇 채를 날렸다’고 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옛날에만 그랬던 건 아니다. 지난달 딸 송지아(18)가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정회원인 ‘골프 마미’ 박연수 씨는 “지아가 골프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골프가 돈이 많이 든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그런데 금전적인 압박이 정말 정말 컸다”고 했다.
한국에서 골프 선수를 키우는 일은 1998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US여자오픈 챔피언 박세리(48)가 아버지 박준철 씨 손에 이끌려 골프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가족 사업’이었다. ‘땅콩’ 김미현(48)도 아버지 김정길 씨와 미국에서 함께 골프장을 다닌 끝에 1999년 LPGA투어 신인상을 받았다. 2001년 같은 상을 받은 ‘모범생’ 한희원(47)에게도 아버지 한영관 전 한국리틀야구연맹 회장이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이들이 LPGA 무대를 호령하던 2003년 미국 뉴욕타임스는 ‘Asian Golfers At Home in LPGA’라는 기사를 통해 한국 ‘골프 대디’를 조명했다. ‘at home’이라는 영어 표현에 ‘집에 있다’는 뜻 말고도 ‘활약하다’는 의미도 있다는 걸 살린 제목이다.
그 기사가 나온 지 22년이 지났다. 박세리의 활약을 보고 자란 ‘박세리 키즈’, 그리고 ‘박세리 키즈의 키즈’들이 활약하고 있는 요즘 한국 골프엔 골프 대디뿐 아니라 골프 마미들도 적지 않다.
대한골프협회(KGA)에 따르면 17일 기준으로 초등부부터 18세 이하부까지 유소년 골프 등록 선수는 총 2292명이다. 미취학 아동은 이 자료에서 빠진 데다 부모가 동시에 자녀를 지원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렇게 보면 ‘골프 대디’, ‘골프 마미’가 3000명은 넘는다는 게 일반적인 추산이다. 선수보다 더 바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하루를 따라가 봤다.
프로 골퍼를 꿈꾸는 이지유(16·은광여고)는 7월 강원 원주에서 열린 김효주-퍼시픽링스 코리아컵 주니어챔피언십에서 준우승한 유망주다. 이지유의 아버지 이규덕 씨는 매일 오전 6시에 기상해 하루를 시작한다. 딸을 깨워 오전 7시까지 등교시키고 나면 이 씨는 차에 앉아 딸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서울 은광여고 골프부 학생은 1교시를 마치면 교실에서 나올 수 있다.
이 씨는 이지유가 타석이나 파3홀에서 스윙과 쇼트게임 연습을 할 때도 항상 곁에서 지켜본다. 성남=홍진환 기자 jean@donga.com딸이 학교에서 나오면 이 씨 부녀는 종합 아카데미가 있는 경기 성남 남서울컨트리클럽으로 향한다. 학교에서 이 골프장까지는 차로 약 30분이 걸린다. 이지유는 보통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코치에게 골프 교습을 받는다. 아버지 이 씨는 골프장 커피숍을 ‘사랑방’ 삼아 다른 골프 부모와 함께 딸을 기다린다.
종합 아카데미 수업이 끝났다고 그날 일정이 끝나는 건 아니다. 일반 학생들이 방과 후에 학원을 찾는 것처럼 유소년 골프 선수들도 매일 학원으로 향한다. 입시 과목마다 학원이 따로 있듯이 골프에도 비거리, 쇼트게임, 퍼트 등 기술별 아카데미가 따로 있다. 골프 선수들은 보통 요일을 정해 놓고 돌아가면서 ‘단과반’ 수업을 듣는다.
이지유의 연습이 끝나면 딸의 골프백을 들고 나와 차에 실은 뒤 기술별 아카데미로 또다시 향하는 골프 대디의 삶을 살고 있다. 성남=홍진환 기자 jean@donga.com학원이 끝나면 ‘자율학습’이 이어진다. 남자 선수들은 대개 피트니스 센터로 향한다. 이지유 같은 여자 선수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하는 근력 운동은 기본이고 요가나 필라테스, 체형 교정센터를 찾는 경우가 많다.
이 씨는 “멘털 클리닉을 가는 날도 있어서 일과를 다 마치고 나면 보통 오후 10시가 된다. 하루 종일 지유를 데리고 다니다 보면 나도 훈련을 받은 것처럼 힘이 들어 금세 잠이 들곤 한다”면서 “지유가 다른 선수들보다 늦은 중1 때부터 골프를 시작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려고 한다. 내 몸이 좀 힘들어도 딸의 성공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씨 부녀가 하이파이브 하는 모습. 성남=홍진환 기자 jean@donga.com자녀가 성인이 된다고 골프 대디, 골프 마미 생활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프로 선수가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남녀부를 합쳐 294명이 KGA 대학부 소속이다.
6년 차 골프 마미 오정민 씨 역시 딸 구다은(19·고려대)이 올해 대학 새내기가 된 뒤에도 ‘라이딩’을 이어가고 있다. 구다은은 7월 열린 회장배 대학 대항 골프대회 개인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대학 무대에서 강자로 꼽히는 선수다.
오 씨는 “다은이는 골프 특기자가 아닌 일반 수시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다은이가 학업과 운동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도록 옆에서 지원하고 있다”면서 “다은이가 골프 선수로 성공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골프를 통해 인생을 배우고 인성이 좋은 선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고 말했다.
● 연간 1억5000만 원+α
골프 선수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가장 힘들어하는 건 역시 ‘돈’이다. 몸은 힘들어도 버티면 되지만 돈이 없으면 자녀가 골프를 계속하는 데 문제가 생긴다. 이 씨는 “골프 선수들 키우는 부모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움직이면 다 돈’이라는 것”이라면서 “정규 라운드는 물론이고 9홀짜리 파3 연습장을 사용할 때도 비용을 내야 한다. (서울) 강남에서 과외를 시키는 것보다도 돈이 더 많이 든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서울 근교 종합 아카데미 한 달 등록 비용은 평균 250만 원 수준이다. 연습 타석 비용도 따로 결제해야 하는데 보통 연간 700만 원이 넘는다. 종합 아카데미를 보내는 데만 1년에 3000만 원을 넘게 써야 하는 셈이다. 기술별 아카데미 비용은 별도다. 예를 들어 비거리 아카데미의 경우엔 10회에 350만 원 수준이다. 실전 감각을 익히려면 주기적으로 필드 라운드도 해야 한다. 장비도 주기적으로 바꿔 줘야 한다.
특히 전지훈련을 가야 하는 겨울방학 때는 돈이 훨씬 더 든다. 종합 아카데미는 겨울 추위를 피해 12월부터 이듬해 2월 사이에 동남아시아나 미국, 유럽, 호주 등으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보통 45일 일정을 잡는데 상대적으로 저렴한 동남아도 20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발생한다. 미국으로 가면 3000만 원이 훌쩍 넘는다. 부모가 동행할 때는 비용이 두 배가 된다.
대회에 참가할 때도 돈이 든다. 유소년 대회는 지방에서 열리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의 골프장은 차량 없이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기름값부터 숙박비, 참가비를 합치면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200만 원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
송지아의 어머니 박 씨는 “호주는 유소년 선수들이 시합을 나갈 때 비용을 전혀 지불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부러워했다”면서 “해마다 평균 1억5000만 원 정도 든 것 같다”고 말했다.
골프계 한 관계자는 “자녀에게 골프를 시키는 모든 가족이 이 정도 금액을 부담할 만큼 여유가 있는 건 아니다. ‘너 때문에 집까지 팔고 직장까지 그만두면서 뒷바라지했으니 꼭 성공해서 보답해야 한다’고 말하는 부모도 적지 않다. 자녀에게 부담이 되는 말이라는 걸 모르지 않겠지만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 성공 확률은 바늘구멍
KLPGA투어는 1년에 48명을 정회원으로 뽑는다. 정회원 자격이 있어야 KLPGA투어(1부)나 드림투어(2부) 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 KLPGA투어 관계자는 “정회원에 도전하는 선수는 1년에 대략 500명 정도다. 그중 10% 정도만 그 자격을 얻는다”면서 “정회원 자격을 얻은 선수들 중에서도 그해 1부 투어에 진입하는 선수는 20명 정도”라고 설명했다. 우승 경쟁을 하거나 톱10에 드는 선수는 이 중에 겨우 한두 명이다.
갈수록 유소년 선수가 늘어나기 때문에 경쟁도 그만큼 치열해진다. KGA에 따르면 2021년만 해도 유소년 선수는 2025명 수준이었다. 갈수록 유소년 인구가 줄어들고 있지만 골프를 하려는 선수는 4년 만에 10% 넘게 늘었다.
그렇다면 성공하는 선수의 조건은 무엇일까. 구철 넥스트크리에이티브 상무는 ‘내면의 승부욕’을 첫째로 꼽았다. 구 상무는 전 여자골프 세계 랭킹 1위 고진영(30), 2014년 KLPGA투어 신인왕 백규정(30), 지난해 KLPGA투어 공동 다승왕 박현경(25) 등을 발굴한 인물이다.
구 상무는 “유소년 선수 중 승부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내면에 간직하는 선수들이 있다. 이런 선수들의 공통점은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고 자기 할 일을 꾸준히 하면서 승부욕을 키워 나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계속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성공한 선수들에게는 모두 이런 특징이 있었다. ‘골프 센스’는 타고나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꾸준한 단련을 통해서도 이런 능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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