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혈하다 실신까지…아프리카 빈민 80만명 생명 지킨 한인 간호사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9월 23일 17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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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실 케냐 성 데레사 진료소장(오른쪽)이 진료소를 방문한 환자를 부축하며 활짝 웃고 있다. 아산사회복지재단 제공

‘한 번 사는 인생, 다른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멋진 삶을 살고 싶다.’

젊은 시절의 다짐이 아프리카 의료취약지 주민 80만 명의 생명을 지킨 희망의 등불이 됐다. 약자에 대한 관심이 그를 수녀로, 아프리카 오지에서 25년을 헌신하는 간호사로 만들었다. 케냐 성 데레사 진료소 정춘실 진료소장(59) 이야기다.

● 진료소 만들고, 의사 키우고…케냐 의료 취약지 헌신


정 진료소장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1995년 영국에서 수녀로 종신서원을 했다. 단순히 남을 돕는 것을 넘어 생명을 살리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 영국 런던 북서쪽 미들섹스대에서 간호학을 공부했고, 1999년 간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2000년 아프리카로 향한 그는 케냐와 말라위에서 풍토병과 감염병 치료 실무를 익히며 케냐 간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2003년 케냐 수도 나이로비 외곽 키텐겔라 지역으로 파견된 그는 의료 시설이 없어 고통받는 주민들을 위해 ‘성 데레사 진료소’ 설립을 주도했다. 민간병원 대비 20~30% 수준의 진료비였지만, 양질의 진료를 제공해 주민들의 건강 향상에 공헌했다.

진료소는 현재 연간 2만8000여 명을 진료하는 의료기관으로 성장했다. 정 진료소장은 현지인들이 스스로 진료소를 운영할 수 있도록 의사, 간호사 육성에도 힘썼다. 진료소 청소부의 자질을 알아보고 임상병리사가 되도록 도왔고, 가난 탓에 꿈을 접었던 청년은 정 진료소장 덕분에 의사가 돼 현재 진료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진료소에서는 내과, 안과 외에도 풍토병과 영양실조에 취약한 소아 진료와 예방접종, 임산부의 산전·산후 관리도 가능하다. 진료소 방문이 어려운 오지 주민들을 위해 이동 진료실도 운영 중이다.

● 아프리카 최빈국 말라위 여성-신생아 사망률 낮춰

정춘실 케냐 성 데레사 진료소장(앞줄 오른쪽 두 번째)과 진료소 동료들. 아산사회복지재단 제공
케냐 진료소가 안정되자 수녀회는 정 진료소장을 2007년에 말라위 ‘음땡고 완탱가 병원’ 책임자로 파견했다. 음땡고 완탱가는 말라위 치체와어로 ‘깃털의 값(Price of a Feather)’이라는 의미다.

당시 말라위 병원 의료환경은 케냐보다 열악했다. 하루 7~8시간씩 계속되는 정전 탓에 병원 자체의 발전기를 돌려야 했다. 그러나 연료 부족으로 발전기를 돌리지 못해 인큐베이터 속 신생아가 숨질 뻔하거나, 제왕절개 수술 중 전기가 끊겨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수술을 마치는 등 절박한 상황이 이어졌다.

관계 기관에 전기 공급을 요청하고, 연료를 구하러 주유소를 찾아 헤매는 것이 일상이었다. 병원은 만성적인 혈액 부족에 시달렸다. 환자를 위해 수혈도 마다하지 않던 정 진료소장은 수혈 중 의식을 잃기도 했다.

그의 헌신 덕분에 병원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응급실이 만들어지고, 감염병 예방 사업을 시작하는 등 열악한 의료 환경도 조금씩 개선됐다. 특히 여성과 신생아 건강 증진에 힘써 사망률을 크게 낮출 수 있었다.

●다시 케냐로…약물 중독 재활 돕는 통합보건센터 설립 목표


2018년 수녀회는 케냐 수도 나이로비 외곽 칸고야 지역에 새로운 진료소를 건립하기로 하고, 정 진료소장을 케냐로 복귀시켰다.

그는 현재 이동진료에 주력하며 새 진료소에 필요한 기금 마련부터 설계, 공사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이끌고 있다. 최근엔 환율과 자재비 상승, 후원금 부족으로 공사가 중단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정 진료소장은 “이 지역의 심각한 문제인 청년 약물 중독 치료와 재활을 돕는 통합 보건의료 센터로 키우고 싶다”고 했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은 아프리카 가장 낮은 곳에서 삶의 희망을 전하며, 사랑과 헌신의 의미를 일깨워 준 정 진료소장을 제37회 아산상 수상자로 23일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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