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 교사의 질문에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손을 들고 발표 의지를 보이고 있다. 가족에 대해 말을 안 하거나 머뭇거리는 학생이 없다. 대구교육청 제공
“자, 건강한 가정생활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모니터에 있는 단어를 갖고 문장을 만들어서 발표해볼까요?”
“저는 건강한 가정생활을 ‘자정’으로 표현했어요. 자정이라는 뜻이 오염된 물 같은 게 생물학적 작용으로 인해 깨끗해지는 현상이잖아요. 제가 가족들과 생활하고 대화하다보면 그것으로 제 마음으로 깨끗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와, 선생님은 ‘자정’이 밤 12시를 말하는 줄 알았어요. 멋진 문장이었어요. 다음 학생은 건강한 가정생활을 ‘철’이라고 했다가 ‘광물’이라고 했네요. 어떤 의미인지 말해볼까요?”
“철은 무기를 만들 때 사용하잖아요. 만드는 과정에서 망치 같은 것으로 치면 더 단단해지잖아요. 가족들도 곤란한 일을 겪으면서 더 단단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광물은 모양도 다르고, 색깔, 성질도 다르잖아요. 이처럼 가족들도 형태가 다르다고 봐서 광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좋아요. 모두 박수 한 번 쳐줄까요.”
지난 3일 오전, 대구교육대 대구부설초등학교(이하 대구교대 부설초) 6학년 2반 수업 시간. 학생들과 교사 사이 오고 가는 대화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말로는 선뜻 말하기가 어려울 법한 질문이다. 그런데 초등학생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손을 들고 발표하려 한다. 어른이 봐도 기발한 논리적 접근이다. 초등학생들인데 행복한 가정에 대한 뚜렷한 소신을 갖고 있다. 어리지만 인구 감소와 미래 인구 구조 변화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형성된 내 가족의 가치관이다. 개념이 긍정적이다. 나중에 자신이 커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긍정적 인식에 큰 영향을 준다. 자식으로 이어지는 지속가능한 선순환이 이뤄지면 국가적으로 엄청난 소득이다. ‘가족, 가정을 만들어라’가 아닌 ‘형성할 수 있다’의 가능성과 ‘형성해도 좋다’는 정서가 깊어진다. 교육의 효과다.
● 출산 장려금에 갇힌 저출생 문제, 가족공동체 형성 교육으로 한계 넘다
대구광역시교육청(이하 대구교육청)은 이렇게 미래 가족 형성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관과 태도를 길러주기 위해 ‘지속가능한 가족공동체 형성 교육’을 도입했다. 전국 최초로 지난해부터 추진했다. 국가적 난제인 저출생 문제 해결을 위한 경제 및 복지적 차원의 접근은 한계가 있다고 봤다. 본질적 교육으로의 접근을 통해 가족 구성원이 다양한 가족 형태를 존중하면서 가족의 변하지 않는 본질적 기능과 가치를 계속 재발견하도록 유도하는 게 장기적으로 낫다고 봤다.
대구교육청 내 5개 선도학교(54학급)에서 ‘가치, 포용, 공존’이라는 가족친화적 교육 원리 기반으로 가족의 기능과 가치에 대한 개념 기반 탐구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27개 실천학교에선 가족과 함께 하는 체험과 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대구교육청과 직속기관, 교육지원청, 도서관 등에서도 가족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158개의 가족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사회로 나가 사람을 존중하고 포용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세대와 세대를 잇는 연결 의식과 책임감이 생긴다. 지역 사회가 이를 지지하는 문화가 형성되면 사회의 지속가능성이 열린다. 그래서 슬로건은 ‘가족을 이루다, 미래를 잇다’다. 강은희 대구시 교육감은 “대구교육청의 정책 슬로건은 단지 행정 문서 안에만 머무는 문구가 아니다”라며 “이것은 우리 아이들의 가치와 인식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실현 가능한 목표이면서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야할 내일의 약속”이라고 말했다.
● 스스로 가족 행복 온도 진단하고 만들어보는 ‘가족 평화 매뉴얼’
정선우 담임교사가 가족간 대화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시 ‘대화가 필요해’를 읽어주고 있다. 아빠는 TV만 보고, 엄마는 휴대폰만 보고, 나는 게임 속 세상에 빠져 서로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대구=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담임 정선우 교사는 학생에게 ‘OO 친구’라고 이름을 부르고 존칭을 붙이면서 자기 가족을 다시 기억해볼 수 있게 한다. 수업에는 남녀 학생 2명씩 4명이 책상을 서로 붙이고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온도계가 그려진 활동지에 가족의 행복에 대한 나의 감정 온도를 빨갛게 색칠해보고, 그렇게 온도를 매긴 이유와 어떻게 물이 끓는, 완벽한 100도까지 올릴지도 아이디어를 내서 4명이 돌아가면서 토론한다. 다들 친구의 말에 집중한다. 각자 작성한 것을 찍어서 파일로 자신의 테블릿에서 공용 테블릿에 업로드하면, 반 학생 모두가 업로드한 과제 내용이 전자칠판에 뜬다. 다시 발표를 한다. 4명 구성원 중 한 명이 다른 구성원들에게 우리의 인상적인 ‘가족 행복 지수’를 얘기해준다.
“옆 친구가 가족 행복 온도를 98도로 칠했는데, 지난 주에 대화를 적게 해서 2도를 뺐다고 해요. 내일부터는 하루에 3번 이상 가족끼리 사랑한다는 얘기를 하고 2도를 늘려보겠다고 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행복했던 우리 가족의 기억을 떠올려보고, 우리 가족 행복 온도를 측정하고 나서 바로 ‘가족 평화 매뉴얼’을 작성해본다. 이건 4명 구성원 공통 과제다. 식사 시간, 여가 시간, 평일, 주말로 나눠 작성해보고 4명 전체가 나와 나눠 발표를 한다. ‘식사 중엔 스마트기기를 사용하지 않겠다’, ‘주말에 서로의 장점을 칭찬해주기’, ‘다같이 집안 일을 나눠서 해보기’ 등 다양한 실행 의견이 나왔다. 이어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각자 생각하는 건강한 가정생활을 핵심 단어로 ‘깨달음’ 문장을 완성해보면서 마쳤다.
활동지에 가족 행복 온도를 표시한 여학생이 같은 모둠 친구들에게 이유와 앞으로 가족에게 어떻게 잘할지를 말해주고 있다. 대구교육청 제공“다음 시간에는 가족끼리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 알아볼 거예요.”
대구교대 부설초의 ‘지속가능한 가족 공동체 형성 교육’은 ‘가화만사성’ 주제로 가족 구성원의 다양한 요구에 대해 서로의 배려와 돌봄의 필요함을 이해하는 프로젝트다. 학생들도 지속가능한 가족의 힘을 느꼈다.
고지후 학생은 “내가 만약 어른이 돼 아버지가 되더라도 가족이 협력하며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함께 성장해 우리 사회를 더 빛나게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김세연 학생도 “여러 가족들의 형태와 가족 공동체가 하는 일을 더 자세히 알게 됐다. 이 수업을 해보니 내가 나중에 자라서도 내 아이에게 이 수업을 받게 해주고 싶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손서율 학생은 “이번 수업을 통해 처음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가족 간의 산책이 당연하지 않다고 느꼈다”는 울림을 전했다. 이어 “지금까지 우리 가족이 100점이었지만 지금은 200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나중에 크면 우리 가족이 꼭 10만 점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초등학생들의 답변치고 수준이 상당히 높다. 그만큼 감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손세아 학생은 “가족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지속가능한 가족 공동체’라는 말에 익숙해지니 우리 가족이 행복했던 순간을 계속 떠올리게 된다. 가족과 힘든 일이 있어도 함께 나누고, 기쁜 일은 더 크게 웃으면서 살아가고 싶다”라고 했다. 한나희 학생은 “수업하기 전에 ‘가족공동체’라는 키워드를 검색해 봤는데 대구에서 주로 이런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내가 어른이 되도 현재의 내 가족처럼 존중하는 가족공동체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다음 수업에 가족과 있었던 갈등을 꺼내보고 해결 방법을 또 집중적으로 논의해보는 시간을 가진 이후에 이 학생들이 어떤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지 상상만 해도 벅차다.
[INTERVIEW] “좋은 가족을 꾸리는데 필요한 지혜와 기술을 가르치는 미래 행복 설계 교육”
강은희 대구시 교육감-‘지속가능한 가족공동체 형성 교육’은 전국 최초다.
“단순히 ‘가족이 소중해’, ‘가족은 이래야 해’ 라고 알려주는 것을 넘어 아이들이 학교에서 실제로 행복한 가족을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지혜와 기술을 배우도록 하자는 것이다. 미래 준비를 시키는 행복 설계 교육이다.”
-가족의 개념은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마치 도화지에 그린 그림처럼 가족은 혈연 중심으로 이뤄진 공동체 의식이 강했다. 지금은 입양 가족, 한 부모 가족, 다문화 가족도 있고, 재혼 가족이 참 많아졌다. 가족의 형태보다는 가족 구성원 간 사랑과 신뢰, 지지, 돌봄과 같은 본질적 기능과 가치가 훨씬 중요해졌다. 이제 아이들은 가정 안에서 보살핌만 받는 수동적 구성원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하고 실천하도록 해 건강한 가족을 만들어갈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나가게끔 해야 한다.”
-어떤 효과를 기대하나.
“가정을 넘어 지역 사회에 가족 친화적 가치를 확산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본다. 지난해부터 학교에 보급한 교수 학습 자료를 바탕으로 가족의 가치를 탐구하는 수업이 내실 있게 꾸준히 운영되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학교 교육을 통한 학생들의 가족 가치 인식의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 효과성 검증 연구도 진행하고 있다.”
-아이들이 저출생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을 한다던데.
“교육청에서 개최하는 ICT 활용 대회에서 아이들이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지속가능한 가족공동체 형성을 위한 창의적 아이디어를 제시해 놀랐다. 맞벌이 가정 돌봄 공백 해소를 위한 대화형 인공지능 로봇이라든가, 가족 간 갈등 완화를 위한 소통 도구로 감정통역사와 언어 통역 프로그램을 프로젝트 결과로 제시하기도 했다. 정책 제안도 해서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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