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 되기 쉬운 ‘치매 머니’ 154조… 외로운 고령자가 위험하다[서영아의 100세 카페]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0월 4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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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생 2막] 소순무 법무법인 가온 고문변호사
한국후견협회 8년 이끈 후견 전도사
“초고령사회 후견은 사회복지의 축”… 정신 맑을 때 후견인 미리 정해놔야
폭넓은 이용 위해 제도보완 필요… 은퇴자들 공공후견 봉사 늘려야

언젠가는 내 힘만으로 살아가기 힘든 순간이 온다는 것, 노후의 또 다른 공포다. 나이가 들수록 떨어지는 인지능력 탓이다. 다행히도 배우자나 자녀가 보호자 역할을 해준다면 복받은 경우. 독신인데 인지장애(치매)까지 왔다면 난감하다. 이런 고령자를 보호하기 위해 2013년 성년 후견제도가 시작됐지만 이용자는 많지 않다. 제도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았고, 이용하기 어렵게 만들어진 탓도 크다.

소 변호사는 폭넓은 후견제도가 초고령사회 한국에서 사회복지의 한 축이라고 말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소순무(74) 법무법인 가온 고문변호사는 2017년 한국후견협회를 만들고 8년간 이끌며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후견전도사’다. 18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을 찾아 우리 후견제도의 현황을 들어봤다. 구체적인 현장 실태에 대해서는 배광열(39) 사단법인 온율 변호사가 도움말을 줬다.

독신 고령자 재산은 임자없는 돈?
뉴스 보도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듯이 혼자 사는 고령자의 재산은 자식과 친지, 이웃은 물론,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쉽다. 이른바 ‘실버 칼라 크라임’이다. 특히 치매 어르신의 경우 간병인이나 가사도우미, 이웃 등 주변 사람들이 재산을 가로채거나 아예 혼인과 입적 등을 통해 증여나 상속을 꾀할 때가 적지 않다. 최근에도 “당신과 결혼해서 평생 보살펴주겠다”며 치매 환자에게서 상가를 빼앗은 60대 식당 여주인이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1 요즘 이름난 실버타운에서는 독신 어르신이 돌아가신 뒤 그를 보살피던 요양보호사나 간병인이 통장과 현금을 갖고 잠적해버리는 사건이 왕왕 발생한다. 자녀가 없거나, 해외에 사는데 친인척 2세들과의 관계도 소원하다면 사망자가 남긴 유산에 신경 쓸 사람이 없다.

#2 “조카들이 대머리독수리 같아요.” 고급 실버타운에서 살고 있는 자산가 A 할머니가 평생 연락없던 조카들이 자꾸 찾아오는 게 공포스럽다며 토로한 표현이다. 기아로 숨이 끊어지기 직전인 소녀와,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독수리의 모습을 찍어 퓰리처상을 받은 유명사진에 빗댔다. 조카들이 마치 자신의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리는 독수리들 같다는 것.

평생 혼자 힘으로 살아온 그는 머리가 희끗해진 조카들이 손주라며 자녀들까지 데리고 오는 것이 영 마뜩치 않다. 조카들을 피해 건강이 더 나빠지면 들어갈 종교계 요양원을 알아보고 여기에 재산 일부를 기부해 최후의 돌봄을 의탁하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다. ‘그들도 믿을 수 없다’는 의구심 때문이다.

1994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수단의 굶주린 아이’. 사진을 촬영한 케빈 카터는 수상 3개월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4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수단의 굶주린 아이’. 사진을 촬영한 케빈 카터는 수상 3개월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서울 도심지에 큰 상가건물을 가진 B 어르신에게도 치매가 찾아왔다. 자식은 없고 친자식 같은 조카가 있어 그를 입양하고 임의후견 계약을 했다. 그런데 뒤늦게 소식을 들은 다른 조카들이 발끈했다. ‘왜 걔만 입양했느냐’, ‘왜 걔가 후견인을 맡느냐’며 난리가 난 것. 어르신은 이미 치매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

조카들은 후견인을 ‘노인학대’라며 고소하고 각자 치매 어르신을 끌고 가 이리저리 작업하더니 결국 조카 7명이 모두 그의 ‘자식’이 됐다. “말년에 자식복이 터지셨네”라는 농담이 절로 나오는 상황. 하지만 후견인이 돼 어르신을 여전히 돌보는 건 처음 입양한 그 조카뿐이다.

지난 8월 대한민국 사회적 가치 페스타에 사단법인 온율이 참가했다. 맨 왼쪽이 배광열 변호사. 사단법인 온율 제공


초고령사회 대비하는 성년후견제도
소 변호사는 “이런 때를 대비해 성년후견인을 준비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성년후견제도는 ‘질병, 장애, 노령 등으로 정신적 제약이 있어 사무 처리 능력이 제한된 사람들에게 법원의 결정으로 의사결정을 거들 후견인을 지정하는 제도’다. 2013년 기존 금치산자·한정치산자 제도 대신 도입됐다.

금치산자 제도가 본인보다는 주위 가족을 위한 제도였다면 성년후견제는 본인의 의사를 중시하고 지원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급격하게 초고령사회가 심화되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 복지 시스템의 한 축으로 인식되고 있다.

앞서 소개한 간병인이 남은 재산을 가져가버린 어르신들도, 독수리들의 먹잇감이 될 것 같다는 어르신도 공식 후견인을 가졌다면 덜 불안했을 것이다. 조카 7명을 자식으로 입양한 어르신의 사례는 조카들은 싸울지언정 후견인이 있어 재산과 신변관리가 유지되는 다행스러운 경우다.

서울 강남구에 자리한 법무법인 가온 사무실에서. 회의실 창가로 서울의 전망이 펼쳐진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문제는 중간에 낀 애매한 보통 사람들”
하지만 성년후견제도는 아직 일반인에게는 생소하다. 고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과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 등에게 적용되면서 유명세를 탔지만 ‘자산가의 전유물’로 인식되기도 한다.

소 변호사는 “재산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이 제도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예컨대 누군가가 가난한 고령자의 수급비를 빼앗으려 하거나, 한 채뿐인 부동산을 요양원 등이 서약서 하나만 받고 기부해버리는 일이 생기는데, 후견인이 있으면 이런 일을 감시할 수 있다는 것. 그는 “후견인의 존재만으로도 재산을 노리는 사람들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있다”고 강조한다.

2018년부터는 치매 공공후견제도가 시작돼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을 대상으로 무료 후견이 이뤄지고 있다. 다만 지난해 4월 기준 심판청구 건수는 누적 562건으로 연간 100건 내외에 불과하다. 공공후견인 수가 부족하고 지자체별 지원에도 차이가 크다. 공공후견인에게는 월 20만 원 정도 활동비가 나오는데, 매주 어르신을 들여다보는 교통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공공후견인과 도움이 필요한 어르신을 연결해줄 치매안심센터들이 제대로 역할하지 못하는 것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다른 한편으로 자산가들을 위해서는 최근 금융권에서 각종 신탁제도를 도입해 홍보중이다.

2018년 배우 이순재 씨를 한국후견협회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맨 왼쪽은 최근 새로 한국후견협회장이 된 박은수 변호사다. 한국후견협회 제공
2018년 배우 이순재 씨를 한국후견협회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맨 왼쪽은 최근 새로 한국후견협회장이 된 박은수 변호사다. 한국후견협회 제공


번거롭고 비싼 한국의 임의후견
소 변호사는 “우리 복지 체계가 재산 기준으로 제공되니 중산층 이상 고령자들은 모두 사각지대에 있다”고 지적한다. 혼자인 고령자에게 치매가 와 버리면 내가 내 재산을 관리 못하고 내 몸을 건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금융권에서 운용하는 신탁제도의 경우 자산은 맡아 관리해줘도 건물 관리, 월세 수금 등의 직접적인 운용은 대리해주지 못한다. 치매 어르신은 더 이상 월세 걷고 세금 내고 건물 수리하는 일을 못하게 됐는데도 금융권은 그런 수요에는 대처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고령자 입장에서는 건강할 때 미리 후견인을 예약해두면 든든할 것이다. ‘임의후견’ 제도가 그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활용도가 매우 낮다. 연간 성년후견인 선임 사례는 5000건 정도인데, 이중 임의후견 신청 건수는 2023년 기준 42건에 불과하다. 심지어 신청 건수 중 약 45.2%만 인용됐다.

여기에는 절차가 번거롭고 비용까지 드는 등 제도의 문제점도 있다. 임의 후견을 신청하려면 공증과 등기를 해야 한다. 훗날 치매진단을 받은 뒤 후견을 가정법원에 청구하면 후견인을 감독할 제 3자를 선임해야 하고 그에게 보수를 지불해야 한다. 이미 치매가 진행돼 법정후견에 들어갈 경우와 절차는 똑같은데 더 비싸고 복잡한 것이다.

<성년후견제도>
: 질병, 장애, 노령, 그 밖의 사유로 인해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된 성인이 가정법원의 결정으로 후견인을 선임받아 재산 관리 및 일상 생활에 대한 보호와 지원을 받는 제도. 2013년 7월 1일 민법 개정으로 폐지된 금치산, 한정치산 제도를 대체해 도입됐다.

O임의후견
: 자신의 사무처리 능력이 부족해질 상황에 대비해 미리 후견인이 될 사람 또는 법인과 후견계약을 체결해, 자신의 재산관리 및 신상보호에 관한 사무를 맡기는 제도. 또렷한 정신일 때 가정법원에 등록해두고 치매가 발병하면 신청한다. 후견인에 대한 감독인이 따로 필요하다.

O법정후견
: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 처리 능력이 부족한 성인에게 가정법원이 후견인을 지정해 보호와 지원을 제공하는 제도.


후견의 민간부문 구심점
―후견협회가 왜 필요한 겁니까?

“성년후견인은 변호사나 법무사, 회계사, 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직역의 전문가들이 맡지만 특정 직역의 사람이 후견인 역할을 완벽하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컨대 법률 전문가는 요양 등의 문제를 결정하는 데 취약하고, 사회복지사는 재산 관리 등 법률적 의사 결정을 돕기 어렵죠. 제대로 된 후견을 위해서는 이들 사이의 정보 교류와 상호 교육이 절실한데, 이런 걸 우리 협회가 맡게 되는 겁니다.”

그는 은퇴자들의 사회봉사 창구로서의 역할도 강조했다.

“가난한 어르신들을 위한 공공후견인 제도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역량 있는 은퇴자들이 사회봉사 차원에서 후견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과 제도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후견협회가 민간 부문의 구심점이 될 수 있지요.”

소 변호사가 맡은 조세소송 중에는 학생들에게 장학금 180억 원을 기부했다가 140억 원에 달하는 세금을 부과받은 황필상 씨 사건도 있었다. 그는 이 사건 무료변론을 맡아 7년 여 소송 끝에 대법원 취소판결을 이끌어냈고 이 공로로 ‘2018 대한민국 법무대상’에서 송무대상을 받았다. 그러나 황필상 씨는 2018년 71세의 나이로 별세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이후로도 황씨 유족은 장학재단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사무실에 찾아온 황 씨의 딸과 함께. 소순무 변호사 제공


‘조세 소송 대가’에서 ‘성년후견 전도사’로
소 변호사는 ‘조세 소송의 대가’로 2017년 한국법률문화상을 수상했고 202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만 20년간 판사로, 만 17년간 법무법인 율촌에서 변호사로 일했고 2016년 사단법인 온율 이사장, 2017년 한국후견협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협회장은 어떤 일을 하시나요?

“주로 돈 만들고 홍보하는 일이죠. 기부문화가 정착되지 않아서 비용 마련에 늘 어려움을 겪습니다.”

2018년 서울에서 열린 제 5회 세계후견대회 개회사를 읽는 소순무 협회장. 한국후견협회 제공
2018년 서울에서 열린 제 5회 세계후견대회 개회사를 읽는 소순무 협회장. 한국후견협회 제공
그가 처음 성년후견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도 소박하다. 그가 이사장으로 일하던 사단법인 온율의 설립목적 중 하나가 성년후견제도 정착이었다. 여기에 박차를 가한 것이 2018년 제 5차 세계후견대회다. 덜컥 유치하게 된 세계대회 준비를 서두를 주체가 없자 급거 후견협회를 만들었다. 세계 성년후견대회는 성공리에 개최됐지만 대회 비용을 협찬받기 위해 대법원과 법무부, 기업들을 찾아다닌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새롭다.

협회는 연 2회 기관지 ‘후견’을 내고 있는데, 알고 보니 그 예산 또한 소 변호사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지정기부한 1억 원에서 충당하고 있었다.

소 변호사가 손에 후견협회 기관지인 ‘후견’을 들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내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준비하는 독일
얼마 전 정부는 치매를 앓는 고령자들이 가진 자산이 2023년 기준 154조 원에 이른다는 통계를 발표했다. 이들 자산의 70% 이상이 부동산이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국은 전반적으로 노후 대비에 대해 너무 안이합니다. ‘난 별일 없을 것’이란 낙관주의가 강하다고나 할까요. 배우자가 치매로 쓰러져도 본인에겐 치매가 안 올 거라고 믿어요. 치매는 뇌의 노화현상입니다. 65세에서 10% 유병율이지만 85세 이상이 되면 80% 이상에서 나타나죠. 내게도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자세로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성년후견을 준비한다면 후견인을 미리 지정하는 ‘임의후견’이 늘어야 하는데, 앞서도 밝혔듯 매우 저조하다.

고령화율 22%로 약 1800만 명이 고령자인 독일의 경우 세계에서 성년후견제도가 가장 잘 정착한 나라로 꼽힌다. 성년후견제도를 이용하는 사람은 150만 건, 한국의 임의후견에 해당하는 ‘지속적 대리권’을 미리 등록한 건수는 600만 건에 달한다. 후견이 필요해질 사람과 후견을 해줄 사람 간의 관계를 미리 등록해 놓는 것. 한국의 임의후견은 공증과 등기가 의무조항이지만 독일에서는 의무가 아니다. 그런데도 600만 건이 등록돼 있는 것이니 실제로는 더 많은 임의후견 관계가 준비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지난 2월 환경재단이 연 그린보트 선내에서 소순무 한국후견협회장이 웰다잉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한국후견협회 제공


아름다운 마무리 준비하는 한국이 되길
소 변호사는 지난 7월 협회장 자리를 내놓고 고문으로 물러났다. 사단법인 온율에서 오랜 기간 함께 해온 박은수 변호사가 협회장을 맡았다. 아직 숙제가 많은 후견사업이지만 토대를 닦았다는 자부심을 안고 제도보완과 문화 쇄신을 기대하고 있다. 전직 의원이기도 한 새 협회장이 국회와 협조해 제도개선에 성과를 내 줄 것도 내심 바라고 있다.

―앞으로 계획은.

“원혜영 전 의원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웰다잉문화운동과 후견협회를 뒤에서 열심히 도울 생각입니다. 사전유언장을 쓰고 자산을 정리하고 기부를 하고 후견을 준비하는 모든 것들이 웰다잉 과정이죠.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하는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한국사회에 제대로 정착해 전국민이 행복한 노후를 맞이했으면 합니다.”

소 변호사는 원혜영 전 의원과 함께 웰다잉문화운동 공동대표를 맡고 있기도 하다. 웰다잉문화운동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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