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선의 기적’… 지하철 방화 침착 대응이 참사 막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6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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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男, 휘발유 붓고 토치로 불질러
“이혼소송 결과에 불만 품고 범행”
기관사-승객들 진화… 420여명 대피

하저터널로 대피하는 승객들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마포역 구간을 운행하던 마천행 열차에서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했다. 이날 화재는 자칫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했으나 승객들과 기관사가 침착하게 대응해 대규모 인명 피해를 막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이 한 줄로 한강 하저터널 선로를 따라 이동하며 질서 있게 대피하고 있다. 서울 영등포소방서 제공
하저터널로 대피하는 승객들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마포역 구간을 운행하던 마천행 열차에서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했다. 이날 화재는 자칫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했으나 승객들과 기관사가 침착하게 대응해 대규모 인명 피해를 막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이 한 줄로 한강 하저터널 선로를 따라 이동하며 질서 있게 대피하고 있다. 서울 영등포소방서 제공
서울 지하철에서 60대 남성이 불을 질러 승객 420여 명이 대피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2명의 목숨을 앗아간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처럼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할 수 있었지만, 기관사와 승객들의 침착한 대응과 화재 대응 시스템으로 사망자가 1명도 나오지 않았다.

1일 경찰과 소방 당국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오전 8시 44분경 서울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과 마포역 사이를 달리던 마천행 열차의 네 번째 칸에서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기관사는 즉시 열차를 멈추고 승객들과 함께 열차 내 소화기로 진화했고, 승객 420여 명은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열차에서 내려 터널 선로를 따라 긴급 대피했다. 21명이 연기 흡입 등으로 병원에 이송됐지만 사망자나 중상자는 없었다.

경찰은 방화범 원모 씨(68)를 체포하고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원 씨는 휘발유가 든 페트병을 들고 열차에 탄 뒤 바닥에 휘발유를 붓고 토치를 이용해 옷가지 등으로 불을 붙인 것으로 조사됐다. 원 씨는 “이혼소송 결과에 불만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22년전 대구의 교훈’… 불 안붙는 의자로 교체, 빠른 진화 빛나


192명 희생 ‘대구 참사’와 유사 상황… 당시 가연성 소재 탓 불길 급속 확산
조기 진화후 80여분만에 운행 재개… 관제센터 CCTV 전송 차질은 문제
방화범, 시민 항의에 “안죽었잖아”

지난달 31일 서울 지하철에서 벌어진 화재 사건을 두고 “5호선의 기적”이란 평가가 나오고 있다. 2003년 192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구지하철 참사와 비슷한 방화였던 탓에 하마터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단 1명의 사망자 없이 조기에 진압됐기 때문이다. 기관사와 시민들이 침착하게 대응하고 관계 당국의 예방·대응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가동된 것이 기적의 원동력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비규환이었던 방화 현장

화재 당시 지하철을 탔던 승객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방화 현장 근처에 있었던 오창근 씨(29)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열차가 출발한 지 1분도 안 돼서 한 남자가 열차 바닥에 노란 액체를 뿌리기 시작했다”며 “곧이어 검은 연기가 열차를 가득 채웠고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우왕좌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비상레버를 내리니 문이 열렸다”면서 “다른 승객들과 함께 여성들부터 대피를 시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대피한 승객들은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신 탓에 연신 기침을 해야 했고, 죽을 뻔했다는 공포감과 살았다는 안도감에 눈물을 흘렸다. 마포역 2번 출구 앞에 있던 박모 씨(73)는 “많은 시민들이 목을 잡고 기침을 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등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고 했고, 주민 김수빈 씨(29) 역시 “양말만 신은 채 대피한 사람도 있었다. 대구 지하철 참사가 떠올라 너무나 섬찟했다”고 했다.

탈출한 일부 시민은 여의나루역∼마포역 구간의 한강 아래 하저터널을 통해 대피했다. 국내 최초의 하저터널로 1996년 개통된 5호선 하저터널의 총길이는 1288m다. 한강 바닥으로부터 최대 약 30m 깊이의 지하를 관통한다.

● 질서 있는 대처와 사전 훈련이 참사 막아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지하철 5호선 열차 방화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이 불을 끈 뒤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기관사와 승객들이 사용한 소화기 3대가 놓여 있고, 열차 곳곳에 소화약제가 가득 뿌려져 있다. 서울 영등포소방서 제공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지하철 5호선 열차 방화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이 불을 끈 뒤 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기관사와 승객들이 사용한 소화기 3대가 놓여 있고, 열차 곳곳에 소화약제가 가득 뿌려져 있다. 서울 영등포소방서 제공
이번 사건은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와 비슷했지만 30분 만에 불길이 잡히고, 연기 흡입과 발목 골절상 등으로 병원에 옮겨진 21명 외에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 불이 조기에 진화되면서 열차 운행도 1시간 22분 만에 재개됐다.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좌석 등 전동차 내부 기기가 불연 소재로 교체돼 불길이 확산되지 않았던 것이다.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엔 방화범이 휘발유로 낸 불이 가연성 내장재를 태우며 급격히 확산돼 미처 대피할 틈도 없이 승객 192명이 사망한 바 있다.

시민들과 기관사의 신속하고도 질서 있는 대처가 돋보였다는 평가도 나온다. 승객들은 화재 발생 직후 비상통화장치로 기관사에게 상황을 알린 뒤 의자 하단의 비상 개폐장치를 이용해 문을 열었다. 기관사는 열차를 바로 멈췄고, 일부 승객들은 기관사와 함께 벽면에 비치된 소화기를 꺼내 화재를 진압했다. 승객들은 선로와 하저터널을 따라 차례로 줄을 서서 질서 있게 대피했다. 김진철 마포소방서 소방행정과장은 “소방차가 도착하기 전 기관사와 승객이 소화기로 불을 꺼 진화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진화된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약 한 달 전 진행된 훈련도 참사를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사고 당시 운행 기관사를 비롯해 영등포승무사업소 직원들은 올 4월 29일 ‘열차 내 화재 대응 및 구원 연결’ 훈련을 실시했다. 열차 내 화재가 발생해 차량이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 등 이번 화재와 유사한 상황을 가정해 대응하는 방법을 미리 익혔던 것이다.

다만 지하철 재난 안전 관리의 허점이 이번에도 드러났다는 지적도 나온다. 5호선 지하철 열차 내에는 총 4개의 폐쇄회로(CC)TV가 있었지만, CCTV 영상이 중앙관제센터에 실시간으로 전송되지 않아 관제센터가 화재 상황을 늦게 파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하철 5호선의 경우 기관사가 홀로 탑승하는 ‘1인 승무’ 체제로 운영되고 있어 향후 비슷한 사고가 발생하면 초동 대응이 늦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 이혼 판결에 앙심 품고 범행

경찰은 방화범 원모 씨(68)를 지난달 31일 오전 9시 45분경 여의나루역에서 붙잡았다. 원 씨는 지하철 선로를 통해 들것에 실려 나오다 손에 그을음이 많이 묻은 것을 수상히 여긴 경찰이 추궁하자 범행을 시인하면서 체포됐다. 5년 전까지 택시 기사로 일하던 원 씨는 얼마 전 이혼한 아내에게 수억 원을 지급하라는 법원 판결에 앙심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원 씨는 방화에 사용한 휘발유를 2주 전쯤 집 근처 주유소에서 샀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고, 범행 직후 항의하는 시민에게 “안 죽었잖아”라며 뻔뻔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1일 원 씨에 대해 현존전차방화치상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소방 당국이 추산한 재산 피해는 3억3000만 원으로 집계됐다. 이번 화재로 열차 1량이 일부 타는 등 소실되고 2량에선 그을음 피해가 발생했다. 서울교통공사는 원 씨에게 구상권을 행사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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