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 30주년] 〈8〉 지역이 초고령사회 해법 낸다
노인들 2∼3시간 마늘 손질 등 작업… 지역화폐로 하루 최대 1.5만원 받아
“일해서 돈 벌고 건강까지 좋아져”… 시범 운영 1년새 누적 14만명 참여
소비에 풀린 18.5억원 지역 활성화
3일 충북 청주시 육거리시장 안 ‘일하는밥퍼’ 작업장에서 어르신들이 마늘 껍질을 까는 작업을 하고 있다. 충북도 제공
“예전에는 하는 일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일을 해 돈을 벌고 건강까지 챙길 수 있어 정말 재미있습니다.”
지난달 26일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무심동로 육거리시장 내 마늘 작업장에서 만난 최병남 할머니(91)가 능숙한 솜씨로 마늘 껍질을 벗기며 말했다. 이곳에서 일한 지 넉 달이 됐다는 그는 “집에서 30분을 걸어오는데,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몸이 더 좋아졌다”며 “심심하지 않게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고, 사회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쁘다”고 했다.
이날 작업장에는 최 할머니를 포함해 80여 명의 어르신이 옹기종기 모여 마늘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들이 하루 동안 손질한 300kg가량의 마늘은 청주 지역 전통시장과 김치 제조업체에 납품된다. 어르신들은 일한 대가로 지역화폐를 받는다. 이 작업장은 충북도가 도입한 ‘일하는밥퍼’ 사업장 가운데 하나다.
● 노인 일자리→소득→지역경제 순환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주민등록 인구 가운데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1024만4550명으로, 전체의 20%를 넘어섰다. 유엔 기준에 따르면 고령 인구가 전체의 20%를 초과하면 ‘초고령사회’로 분류된다. 지방자치 30주년을 맞은 지자체들은 각 지역의 여건에 맞는 고령화 맞춤형 대책을 내놓고 있다. 이 중 충북도가 지난해부터 추진 중인 ‘일하는밥퍼’는 수혜 중심의 기존 노인 복지를 넘어, 고령자의 자립과 지역 경제 활성화를 동시에 도모하는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이 사업은 김영환 충북도지사가 지난해 초, 청주 상당공원 인근에서 무료 급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던 노인들의 모습을 보고 착안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단순한 급식 지원보다 어르신들이 스스로 밥을 사 먹을 수 있도록 자립을 돕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하는밥퍼’는 60세 이상 노인과 취약계층(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경로당(2시간 근무)이나 소규모 작업장(3시간 근무)에서 단순 작업을 수행하고 소정의 활동비를 지급받는 구조다. 활동비는 하루 1만∼1만5000원이며, 지역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지역화폐와 온누리상품권 등으로 제공된다. 작업 내용은 농산물 손질, 공산품 조립, 상품 포장 등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로 구성됐다. 근무 시간도 짧아 고령자들이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충북도는 사업의 이름을 서울의 무료급식 봉사단체 ‘밥퍼’에서 차용했다. 음식을 ‘받기만’ 하던 노인들이 식자재 손질이나 배식에 직접 참여해 ‘밥값을 버는’ 형태로 전환하자는 취지다. 단순 일자리 제공을 넘어 자립을 유도하고, 지역 경제를 순환시키는 세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 목표다.
사업 재원은 충북도 예산과 함께 대한적십자사, 충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 기탁금 등 민간 재원을 함께 활용한다. 지난해 7월 시범 운영을 시작한 이후 현재 도내 72개 경로당과 46개 작업장에서 하루 평균 1700여 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누적 참여 인원은 14만 명을 넘어섰다.
청주 육거리시장 작업장을 운영하는 소윤호 대표(65)는 “일자리 대기자가 30명을 넘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며 “고령자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하고, 사회적 고립감을 줄이며, 전통시장 상인들과의 유대도 깊어지는 등 다양한 긍정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 장애인으로 대상 확대… 서울 경북 전북도 벤치마킹
경제적 효과도 뚜렷하다. 지금까지 참여 어르신들에게 지급된 지역화폐는 총 18억5000만 원 규모에 이른다. 현금이 아닌 지역화폐로 지급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전통시장과 지역 소상공인에게 소비가 이어지면서 지역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11월부터 참여하고 있는 이순옥 씨(71)는 “시장에서 필요한 생필품을 사기도 하고, 손주들에게 용돈을 주기도 하면서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충북도는 올해를 ‘일하는밥퍼 원년’으로 정하고, 장애인 대상 확대(1월), 시행 지침 수립(2월), 수행기관 선정(3월), 지원 조례 제정(4월) 등 제도적 기반 마련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김왕일 충북도 노인복지과장은 “고령화에 따른 생산가능인구 감소는 전국이 안고 있는 문제”라며 “‘일하는밥퍼’는 그 해법이 지역에서 나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고 강조했다.
충북의 실험은 이미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서울시는 충북도와 우수정책 교류 협약을 맺은 뒤 자체적으로 서울형 ‘일하는밥퍼’ 모델을 개발해 운영에 들어갔다. 경북도 공무원들도 올해 1월 현장을 찾았고, 이달 3일에는 전북도 방문단이 제도를 배우기 위해 충북을 찾았다. 김현진 청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일하는밥퍼’는 지역 현장에서 문제를 찾아 아이디어를 내고 정책화해 빠르게 실행에 옮긴 점에서 지방자치의 대표적 성과”라고 평가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