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혼수지하쇼핑센터에서 시계 수리 업체 ‘명성롤렉스’를 운영하는 오종진(56) 장인. 사진=김영호 기자 rladugh2349@donga.com
강산이 변하는 세월 속에 서울 종로의 옛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수십 년간 이어온 시계·전자 장인들의 손끝 기술은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며 ‘아날로그의 마지막 불씨’를 지켜내고 있다.
2023년 여름, 한 소비자가 롤렉스코리아 서비스센터에 빈티지 시계를 맡겼다가 ‘가품’ 판정을 받고 훼손된 상태로 돌려받는 일이 있었다. 사건이 퍼지자 온라인에서는 “예지동 장인을 찾아가라”는 댓글이 쏟아졌다.
세운4구역 재개발로 골목은 흩어졌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예지동을 찾는 까닭은 바로 이런 신뢰 때문이다.
■ 예지동 흩어져도 남은 공동체, 중심은 여전히 종로
종로에서 시계 수리 전문점을 운영 중인 오종진(56) 장인은 “온라인으로 찾아 연락하는 손님이 오히려 늘었다”고 말했다.
시계 수리점 ‘명성롤렉스’의 모습. (사진=김영호 기자 rladugh2349@donga.com)그가 운영하는 ‘명성롤렉스’는 예지동 시계골목에서 60년째 가업으로 이어왔다. 그러나 2021년 예지동이 ‘세운4구역’ 재개발에 포함되며 종로4가 혼수지하쇼핑센터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이 과정에서 평생을 예지동에서 버틴 시계 장인 공동체도 흩어졌다. 일부는 인근 지하상가나 세운스퀘어로 옮겼지만, 업을 그만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시계 수리를 하고 있는 오 장인의 모습. 그는 대부분의 수리 도구를 직접 만들거나 물려 받았다며 수리 기술에 대한 자부심을 보였다. (사진=김영호 기자 rladugh2349@donga.com)명성롤렉스에 맡겨진 물건 대부분은 윗세대부터 내려온 ‘대물림 시계’다. 오 장인은 “손님의 80%는 세대를 건너온 단골이고, 최근엔 해외 한인 커뮤니티 입소문으로 외국에서도 찾는다”고 말했다.
오 장인은 ‘빈티지의 매력’을 강조했다. 그는 “시계는 새 부품으로 바꾸면 오히려 가치가 떨어지기도 한다”며 “갈고 닦는 모든 작업이 종로에서 가능해 가치를 보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계를 수리하고 있는 오 장인. 장인은 수리에 사용하는 현미경(루페), 망치 등이 모두 할아버지 대부터 이어져 왔다고 설명했다. 사진=김영호 기자 rladugh2349@donga.com그는 여전히 종로를 벗어날 생각이 없다고 한다. 이유는 ‘공동체’에 있었다. 장인들은 수요에 맞춰 다른 가게를 소개해 주거나 부품 수급을 돕는 방식으로 ‘공동체’를 꾸려왔다.
오 씨는 여전히 이 공동체가 존재한다고 했다. 특히 “이곳 종로에 인프라가 다 갖춰져 있다”며, “분업화가 되어 있어 작업의 효율도 높고 전문성이 뛰어나다”고 말했다.
■ 세운상가서 살아나는 아날로그, 80세 장인의 손끝
수리수리협동조합의 이승근 장인. “모든 것을 수리한다”는 장인은 세운상가 2층의 메이커스 큐브에서 작업을 하다 현재는 7층까지 작업실을 옮겼다. 사진=김영호 기자 rladugh2349@donga.com세운상가 7층 한 작업실. ‘수리수리협동조합’의 설립자인 이승근(80) 장인은 빈티지 오디오를 분해·수리하며 낡은 기기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는 60년 가까이 전자·오디오 수리와 맞춤 제작을 이어왔고, 단종된 부품을 직접 가공해 끼워 넣는 방식으로 빈티지 음색을 되살린다.
빈티지 오디오 부품을 수리하고 있는 이 장인. 일일히 분해하고 뜯어보며 내부를 살피며 주파수를 맞추고 있다. (사진=김영호 기자 rladugh2349@donga.com)수리수리협동조합이 위치한 세운상가는 “여기서는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만큼 다양한 수리 기술 장인이 밀집한 공간이다. 이 장인은 이곳 여기저기를 옮겨다녔지만, “떠날 생각은 여전히 없다”고 단언했다.
수리수리협동조합이 있는 세운상가 가동 7층의 모습. 이 장인은 이곳이 거주시설과 업무시설이 공존한다며, 쉽사리 떠날 수 없는 장소라고 했다. (사진=김영호 기자 rladudgh2349@donga.com)이 장인은 “세운상가는 우리나라 전자·전기 기술의 원조 같은 곳”이라며 “이곳의 기술과 경험이 이어져야 후배와 동료들이 생계를 지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재개발 속에서도 장인 공동체·산업 문화 지켜야”
세운상가의 광경. 음향기기, 기계 부품 등이 여전히 분주하게 오가며 활기를 채우고 있다. (사진=김영호 기자 rladugh2349@donga.com)세운4구역 재개발 완공이 1년 남짓 남은 상황에서 장인 공동체와 산업 문화의 동반 보존 필요성도 제기된다.
재개발 완료를 1년 앞둔 세운4구역 펜스 앞 노점상들. 서울시는 해당 노점에 대해 별다른 허가를 내준 적이 없으며, 철거 예정이라고 답했다. 사진=김영호 기자 rladugh2349@donga.com세운상가 일대 재정비계획을 분석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송아라 씨는 석사논문에서 “세운상가는 정치·경제 논리에 따라 재개발이 반복됐지만, 장인과 소상공인의 생존권 보장은 부족했다”며 “사회 구성원들의 충분한 논의를 바탕으로 보존 대상과 방식, 가치를 설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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