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수술했는데도 연습에 나왔어요. 누워 있는 것보다 여기가 훨씬 좋아요.” 80대 어르신이 손에 인형을 끼우고 무대에 선다. 어린이집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기다린다. 이야기가 시작되면, 세대의 간극은 인형 너머로 사라진다.
서울 강남의 논현노인복지관에서 활동하는 ‘이야기 지니’ 봉사단. 평균 연령 60~80대인 어르신들이 강남 내 유치원을 찾아가 손인형극과 구연동화를 펼친다. 2017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아이들에게 웃음을, 자신에게는 ‘두 번째 사회’를 선물한다.
‘이야기 지니’에서 활동 중인 세 어르신(이순자, 나정순, 박정례)을 만났다. 오랜 시간 함께 해온 분도, 늦게 합류한 분도 있었다. 활동을 시작한 이유는 저마다 달랐다. 손주와 더 잘 소통하고 싶어서, 혼자 있는 시간이 적적해서. 그렇게 시작한 일이 어느새 7년째, 지금은 어르신들의 일상이 되었다.
“씻고 나오게 돼요”…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는 무대
이야기 지니의 활동 모습 (논현노인복지관) “집에만 있으면 누워서 테레비(텔레비전)만 봐요. 근데 여기 약속이 생기면 씻고 나오게 되잖아요. 그게 좋은 거예요.” 봉사단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나정순 씨가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어린이집 가는 날은 절대 안 빠진다”며 이순자 씨도 조용히 거들었다.
손인형극 주제는 봉사단이 직접 정한다. 회의를 통해 소재를 정하고, 외부 강사와 대본을 논의해 함께 구성한 뒤 연습을 거쳐 무대에 오른다. 전래동화부터 미세먼지, 마스크 착용, 예절 교육까지 시기에 맞게 바뀐다. 30분 남짓한 공연이지만, 그 무대 뒤에는 회의와 연습, 이동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나정순 씨는 공연 날 2시간 넘게 차를 타고 무거운 인형과 장비를 옮겼던 순간을 떠올렸다. 숨이 차고 힘들었지만 아이들 앞에 서면 아무렇지 않았다. “애들만 보면 다 괜찮아요”라는 그의 한 마디에 시간과 마음의 수고가 모두 담겨 있었다.
달려와 안기는 아이들, 존중으로 여는 무대
이야기 지니의 활동 모습 (논현노인복지관) 아이들의 반응을 묻자 이순자 씨는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만 두 살짜리 애들도 다 알아들어요. 박수칠 땐 박수치고, 인형 이름도 기억해서 불러요.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하지만 그는 아이들을 단순히 어린 존재로만 보지 않는다. 아이들의 반응은 늘 그의 기대를 뛰어넘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을 향한 말투 하나, 호칭 하나도 조심스러우며, 아이들 앞에서도 말을 놓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눈높이는 맞추되 존중은 잃지 않는다.
박정례 씨도 그 마음을 이어받듯 첫 무대를 떠올렸다. “처음엔 좀 떨렸어요. 그런데 ‘내 손자라고 생각하자’고 마음을 먹으니까 다 괜찮더라고요.” 그는 곧바로 덧붙였다. “아이들은 다 느껴요. 그래서 더 진심으로 대하게 돼요. 정말 존중해야죠.”
이순자 씨는 공연이 끝난 뒤의 순간을 이야기하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애들이 너무 좋아해요. 막 우리한테 달려와서 안겨요. 어떤 유치원에선 ‘이야기 선생님들한테 안기면 안 돼요’ 하고 말릴 정도였다니까요.”
집중력 잃을 새 없는 아이들, 어르신들의 힘
이야기 지니의 활동 모습 (논현노인복지관) ‘이야기 지니‘의 공연 현장에 있던 강남구 자곡동의 한 어린이집 관계자는 그 모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이야기 지니에게 보이는 반응은 확실히 남다르다”면서 “작년과 올해 두 차례 공연을 봤는데, 어르신들이 얼마나 연습했는지가 느껴졌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의 집중력이 짧아 쉽게 흐트러질 수 있지만, 공연 내내 몰입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는 “아이들 반응에 따라 공연을 유연하게 바꾸신다”며, 웃음이 터지면 장면을 더 살리고 공연 시간도 자연스럽게 조절하는 세심함을 강조했다.
“아이들이 젊은 선생님만 보다가 어르신들을 만나면 한층 더 포근하고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르신들의 따뜻한 언어와 아이를 대하는 마음이 그 친밀감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신청에서 떨어지면 아쉽다. 출장 기회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세 사람 모두 아이들의 환한 웃음을 떠올리며 같은 마음을 전했다. “아이들이 저렇게 밝게 웃는데, 나도 밝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수도 웃음으로… 어르신들의 팀워크
이야기 지니의 활동 모습 (논현노인복지관) 이야기 지니는 무대 위든 뒤든, 서로를 향한 배려와 끈끈한 협업이 흐른다. “세월이 있으니까요. 연습할 때 합이 너무 잘 맞아요.”라고 입을 모았다.
나정순 씨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누구 하나 주인공이 되려 하지 않아요. 주연이든 조연이든 욕심 안 내고,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하면 되는 거예요.”
이야기 지니에는 성격도, 목소리도 제각각인 이들이 모여 있다. “제가 톤이 굵으면 굵은 역할을 맡고, 꾀꼬리면 꾀꼬리. 각자 가진 걸 살려요.” 자기 목소리로, 자기 걸음으로 다르지만, 무대 위에서는 같은 방향을 향한다.
나정순 씨의 말처럼, 마음이 결국 하나로 모인다. “우리가 화목해야 아이들도 그걸 느끼죠. 아이들은 다 보고 배워요.” 서로의 실수는 웃으며 넘기고, 누구 하나 다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쌓인 순간들이 모여, 하나의 무대가 완성된다.
선 하나씩 지우며, 다시 배우는 사회
이야기 지니의 활동 모습 (논현노인복지관) “여기 올 때마다 유치원 다니는 기분이에요.” 박정례 씨의 말에 모두 웃음이 번졌다. “나도 유치원생이야.” 단순한 농담 같지만, 그 안엔 ‘이야기 지니’가 어르신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감정을 열어주는 활동인지가 담겨 있다.
박정례 씨는 활동을 통해 스스로 변해가는 모습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여기 와서 내가 그어놓은 선을 하나씩 지워가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내 사회가 참 좁았구나 싶었어요.”
나정순 씨도 같은 맥락에서 자신의 변화를 짚었다. “이 나이에 내가 아직 변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어느새 자신도 놀라고, 웃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야기 지니는 어르신들에게 ‘두 번째 사회’가 된다.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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