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내 사고-민원때마다 대책 쌓여
교육 대신 행정처리에 시간 빼앗겨
“책임 가리려는 성격… 간소화 필요”
서울의 한 중학교 교사 A 씨는 최근 수학여행지 답사를 준비하면서 황당함을 느꼈다. 서울시교육청 매뉴얼의 ‘출발 전 차량 안전점검표’에 차량 앞바퀴 재생 타이어 사용 여부와 타이어의 마모 균열 상태를 확인하라는 항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숙소 점검 체크리스트’에는 숙박 시설의 완강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묻는 항목도 있었다.
A 교사는 “현실적으로 교사가 이런 사항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며 “그런데도 매뉴얼에서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으니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교사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구조”라고 말했다.
● 교사가 음주감지기로 버스 기사 음주 여부 확인
학교가 ‘과잉 매뉴얼’에 빠져 있다. 학교 현장에서 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나거나 학부모 민원이 발생할 때마다 ‘매뉴얼’이라는 대책으로 대응하다 보니 각종 행사 및 시설마다 수백 쪽에 이르는 매뉴얼이 쌓이게 된 것이다. 교사들은 ‘매뉴얼에 있는데 왜 체크하지 않았냐’며 책임이 전가되다 보니 교육에 집중할 시간을 과도하게 행정 처리에 빼앗기고 있다고 토로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현장체험학습이다.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에 따라 운송사업자는 버스 기사의 음주 여부를 확인해 그 결과를 학교에 통보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일부 교육청의 현장체험학습 매뉴얼에 ‘필요할 경우 학교에서 실시한다’는 조건이 달려 있어 결국 교사들이 현장에서 체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특히 현지에서 숙박하고 오는 수학여행에서는 매번 교사가 운전기사의 음주 여부를 직접 측정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대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 B 씨는 “혹시라도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는 만큼 현장체험학습을 가기 전, 교사가 직접 음주감지기로 버스 기사의 음주 여부를 확인한다”고 말했다.
매뉴얼이 있더라도 책임을 지는 주체가 모호해 학교 현장에서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세종의 한 초등학교 교사 C 씨는 교내 폐쇄회로(CC)TV 관리 업무를 맡던 중, 학생이 두고 간 자전거가 주말에 도난당하자 학부모 항의에 주말에 출근해 CCTV를 확인해야 했다. C 씨는 “매뉴얼상 ‘학교장이 CCTV 관리감독에 대한 책임을 진다’고 되어 있지만, 관리감독 주체가 정확히 행정실을 지칭하는 것인지 교사인지 불분명해 갈등이 생겼다”고 말했다.
학교 현장에서는 이 같은 매뉴얼 과잉이 결국 학생 피해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강원도의 한 고교 교사 D 씨는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매뉴얼을 숙지하고 챙기다 보면 정말 필요한 학생들 교육과 지도에 집중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기본적인 매뉴얼은 필요하지만 매뉴얼을 간소화하고, 교사에게 과도한 책임을 지게 하는 구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박남기 전 광주교대 총장은 “지금 학교 현장의 매뉴얼들은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고가 발생했을 때 책임 소재를 가리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며 “교사가 교육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승진 좋은교사운동 정책위원장은 “특히 현장체험학습 등 확인해야 할 매뉴얼이 많은 사안에 대해서는 개별 교사가 다 떠맡을 것이 아니라 교육청 차원에서 인력을 활용해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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